[베이스볼 피플] SK 운영팀장 진상봉 “류현진 놓친 아쉬움? 이재원 믿었다”

입력 2014-05-15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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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상봉 SK 운영팀장은 1997시즌을 끝으로 쌍방울에서 은퇴하며 트레이너와 스카우트를 거쳐 지금의 자리에 올랐다. 이재원과 최정, 정근우 등을 발굴한 진 팀장은 스카우트를 종합예술이라고 말했다. 사진제공|SK 와이번스

■ 진상봉 SK 운영팀장

2006년 스카우트 시절 이재원 1순위 지명
올 시즌 4할 타율로 우뚝…때를 기다렸다

현역 은퇴후에 트레이너서 운영 팀장까지
롱런 비결? 나보다 팀을 먼저 생각하는것


로마 제국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도시국가 카르타고는 전투에서 패하면 장수를 사형에 처했다. 반면 로마는 패한 장수에게 다시 기회를 줘 전선에 내보냈다. 패전의 경험을 흠결이 아니라 자산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것이 고대 지중해 패권을 가른 포에니 전쟁의 승패를 가른 요인이라고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말했다.

SK는 2006년 신인지명에서 동산고 좌완투수 류현진(LA 다저스)을 뽑지 않았다. 진상봉 당시 스카우트 팀장(현 SK 운영팀장)은 인천고 포수 이재원(27)을 1차 1순위로 지명했다. 류현진은 SK와 롯데를 지나쳐 3순위인 한화의 선택을 받았다. 그 이후 류현진의 행적이 어떠했는지는 굳이 장황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스카우트 팀장을 문책해도 할말 없는 상황. 그러나 SK는 다시 기회를 줬다. 오히려 운영팀장으로 승진까지 시켰다. 류현진을 뽑지 않아 잘했다는 뜻이 아니라 당시 발을 디디고 있었던 현실에서 최선의 판단을 했음을 인정해준 것이다. 2006년 신인지명이 아쉬움은 남겼을지언정 실패는 아니었음이 2014년 입증되고 있다. 이재원은 14일까지 타율(0.465) 장타율(0.737) 출루율(0.496)로 현 시점에서 한국프로야구 최강의 타자다.


● “사람을 판단하려면 자기 주제부터 알아야 한다”

이재원의 잠재력이 터진 것을 두고 사람들은 “누구 대신 뽑은 선수인데 마땅히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수차례 고사 끝에 겨우 인터뷰에 응한 진 팀장은 덤덤했다. “언제일지를 기다렸을 뿐, 잘할 줄 알았다.” 원래 과묵한 성품이지만 진 팀장은 이재원에게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이재원이 잘나가는 지금이라고 다르진 않다. 진 팀장은 “스카우트로서 뽑은 선수는 자식과 같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있겠느냐?”고 말했다. 뽑지 않아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아까운 선수는 있어도 특정선수를 잘 뽑았다고 자랑하는 일은 스카우트의 본분이 아니라는 얘기로 들렸다.

진 팀장은 빙그레에서 외야수로 뛰었다. 경성대 졸업 후 지명권을 가진 OB가 영입을 포기하자 상무에 입단했고 제대 뒤 빙그레의 지명을 받아 1990년 프로선수가 됐다. 막상 와보니 이강돈 이정훈 고원부 등이 버티는 외야에 그의 자리가 없었다. 대타 인생이 기다렸다. 대타로 단 한번의 찬스에서 성공하려면 과단성이 있되 흥분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인생을 살면서 야구를 잘하진 못했어도 자기 주제는 알았던 것 같다.” 그것이 롱런의 비결이었다. 불평불만 없이 개인보다 팀을 먼저 생각했기에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빙그레에서 주장까지 선출됐다.

그러다 돌연 1995년 12월 쌍방울로 트레이드됐다. 이어 1997시즌 후 쌍방울에서 코치 제의가 들어오자 은퇴를 결심했다. 선수는 타의에 의한 은퇴에 반발하기 마련인데 이때도 “내가 대스타가 될 능력자는 아니지 않는가?”라고 물러섰다. 쌍방울에서 전력분석과 트레이닝을 겸직하는 코치로 일했다. 2000년 쌍방울이 SK로 흡수된 뒤 같은 일을 할 줄 알았다. 그런데 SK는 스카우트 일을 제의했다. 하루를 고민하고 ‘하겠다’고 했다. “무명선수” 출신으로서 지도자로 대성하기보다 프런트의 길에서 기회를 찾았다. 스카우트 인생의 시작이었다.


● “그 선수들이 이제 FA네요”

맨땅에 헤딩하듯 뛰어든 스카우트. 첫 작품으로 2001년 신인지명에서 정상호 김강민 채병용 박재상 등을 뽑았다. 이어 2002년 제춘모 윤길현 박희수, 2003년 송은범, 2004년 윤희상 정우람 등이 진 팀장이 캐내온 ‘원석’들이다. 진 팀장은 “SK 에서 잘 키워낸 덕분”이라고 공을 돌렸으나 SK V3의 토대는 이때부터 완성됐다.

2005년 신인 지명에서는 최정과 정근우를 동시에 뽑았다. 최정이야 논란의 여지없는 우선지명이었으나 2차 1순위로 정근우를 뽑는 것을 두곤 말이 많았다. 구단 고위층에서 “저 땅콩 같은 선수를 뽑아서 어디다 쓰느냐?”고 핀잔을 줬으나 진 팀장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실무자의 의견을 중시하는 문화가 강한 SK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정근우가 데뷔 첫 해 ‘죽을 쒔을’ 땐 마음고생이 심했다. 그러나 2년차부터 잠재력이 터지더니 한화로 이적한 올해까지 한국 최고의 2루수란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진 팀장이 스카우트로서 뽑은 마지막 선수가 2007년 데뷔한 김광현이었다. 류현진을 놓쳤기에 절대 잡아야 할 좌완투수였다. 메이저리그의 입질도 있었으나 진 팀장은 아버지를 설득해 SK 유니폼을 입혔다. 진 팀장은 “한기주가 KIA 입단할 때 계약금이 10억원이었는데 광현이는 5억원에 사인했다. 지금도 광현이 아버지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진 팀장은 SK 창단과 동시에 해왔던 스카우트 업무에서 손을 떼고 2008년부터 운영에 집중하고 있다. 진 팀장은 스카우트를 “종합예술”이라고 압축했다. 원석을 발굴하는 것은 스카우트 몫이지만 그 원석이 보석이 되도록 만드는 것은 구단의 육성시스템과 현장 지도자의 능력에 달려 있음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진 팀장은 “그래도 선수 선발의 성패 책임은 스카우트에게 귀속된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카우트는 늘 (뽑지 않는 선수에 대한) 마음의 빚을 지니는 직업”이라고 말했다.

인천|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mats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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