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야구도 이호준처럼.’ NC 이호준은 통산 300홈런에 단 1개만을 남겨뒀다. 한때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기도 했지만, 꾸준하게 묵묵히 한 길만을 걸어온 베테랑 타자의 위대한 이정표다. 이호준이 친정팀 SK와의 경기에 앞서 배팅훈련을 하고 있다. 문학|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해태 007작전 끝에 투수로 프로 첫 발
친구 김재현에 고의 홈런 의심 사 아웃
타자 전향했지만 야구보다 노는데 열중
SK 이적 후 2002년 23호 이듬해 36호
KS 우승반지 3개 끼고 2012년 NC행
39세 불구 299홈런 꺼지지 않는 불꽃
1993년 가을은 프로야구와 대학간의 스카우트 전쟁이 치열했다.
1990년 서울의 투수 ‘빅3’인 임선동, 고(故) 조성민, 손경수를 놓고 LG와 OB의 경쟁이 시발점이었다. 휘문고 임선동에게 4억원 현찰이 든 007가방이 오가던 때였다. 공주고의 박찬호가 한양대로 간 것도 빙그레가 제시했던 계약금(3000만원)이 너무 적어서였다.
프로구단은 지역연고 고졸 예정선수가 대학에 진학하기 전에 입단서류를 받아내려고 노력했다. 대학교도 맞섰다. 스카우트 비용을 어떻게 충당하는지는 몰라도 선수에게 제시한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1993년 스카우트 전쟁을 더욱 뜨겁게 만든 팀은 LG였다.
신일고의 기대주 김재현이 일본에서 벌어진 국제대회에 참가 중이었는데 스카우트 팀이 몰래 일본까지 쫓아가서 입단서류에 도장을 받아왔다. 김재현은 연세대 입학 예정이었다. 광주일고 졸업예정자 이호준도 연세대에 가기로 했지만 해태도 탐을 냈다. 소속 학교는 달랐어도 김재현과 이호준은 유난히 친했다. 김재현을 빼앗긴 연세대는 비상수단을 썼다.
프로팀의 입단서류제출 마감 때까지 합숙을 핑계로 이호준을 데려갔다. 선배들이 곁에서 24시간 감시했다. 해태는 신동수 등 고교졸업예정 선수를 대학입학시험장에서 몰래 잠입해 빼돌린 뒤 계약하는 등 화려한 전력이 있어 연세대가 더욱 조심했다. 이호준으로부터 아직 도장을 받지 못한 해태로서는 방법이 없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 고졸 신인선수 등록마감 시한 뒤에 등록된 선수
KBO에 제출해야 하는 서류의 마감시한이 지난 뒤에서야 연세대는 이호준 보호에 성공했다고 믿고 비상을 해제했다. 서울 올림픽유스호스텔에 머물던 이호준은 밤 12시가 넘어서야 선배들 틈에서 빠져나와 가족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소재를 알렸다. 즉시 해태에 그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해태 스카우트였던 고(故) 김경훈은 한밤중에 움직였다. 이호준을 만났고 계약서에 도장을 받아냈다. 다음날 이상국 해태 단장이 KBO 사무실로 쳐들어가 서류를 접수시켰다.
이 단장이 내세운 논리는 이랬다. “연세대에서 미성년자 선수를 납치했다. 위법을 저질렀다. 데리고 다니면서 선배들이 폭탄주도 먹여서 도망을 못 가게 했다. 이는 미성년자 약취유인으로 법을 어긴 행동”이라고 우겼다. 당시 아마추어 야구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프로야구로서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해태의 말을 들어줬다. 서류마감이 지났는데도 이호준의 프로입단 등록서류를 받아줬다. 최초의 사례였다. 이호준은 프로-아마추어 협정에 위반하는 2중 등록 선수가 될 상황이었다. 연세대에서 등록을 강행하면 문제가 될 것은 뻔했다. 그러나 연세대는 순순히 물러섰다. 이호준은 1994년 해태 유니폼을 입었다.
● 한 시즌 만에 끝난 투수로서의 경험 그리고 질풍노도의 시기
투타겸용 선수로 기대가 컸던 이호준은 1994년 투수로 시작했다. 성과는 없었다. 이호준에게 의미 있는 경기는 시즌 막판에 나왔다. 잠실에서 벌어진 LG전이었다. 패전 처리로 등판했던 그날 친구 김재현에게 시즌 20호 홈런을 맞았다. 고졸 루키가 사상 처음으로 20-20클럽을 달성하는 순간의 희생양이 됐다. 해태 코칭스태프는 이호준이 친구를 위해 홈런을 서비스했다고 의심했다. 김응룡 감독의 분노가 대단했다. 이후 이호준은 두 번 다시 마운드에 올라가지 못했다. 결국 타자로 전향했다. 김재현과 ‘토끼와 거북이 경주’를 시작했다.
주위의 기대와는 달리 해태에서 몇 년 동안 부진했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다. 사고도 해프닝도 많았다. 당시 그를 알던 사람들은 지금의 이호준을 상상하지 못한다. 야구를 게을리 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을 더 좋아했다. 해태는 특단의 대책을 찾았다. 스카우트를 담당했던 고 김경훈 팀장의 넓은 발을 이용했다. 광주의 안면 있는 주먹들에게 은근한 부탁을 했다. 이호준과 다니는 친구들을 떨어트려 달라고 했다. 혹시 밤에 시내에서 이들과 함께 있는 것을 보면 즉시 코칭스태프에 전화해달라는 부탁도 했다. 같이 지내던 친구들을 혼내면서 이호준 주변에 놀 친구가 없게 만들었다.
그래도 쉽게 야구에 매달리지 못했다. “조금만 더하면 될 텐데”라며 기다리던 해태는 결국 기대를 접었다. 2000년 6월 SK와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상대는 잠수함투수 성영재였다.
● 새로운 환경에서 새롭게 시작한 야구인생
SK에 오고 나서야 야구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환경이 사람을 바꿨다. 바꿔 말하면 해태의 강인한 유망주 육성방법이 허술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호준은 2002년부터 숨겨뒀던 ‘잠재력’을 터뜨렸다. 23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2003년에는 팀을 한국시리즈까지 이끌었다. 36홈런 102타점을 기록하며 4번타자로 큰 역할을 했다. 팀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통과해 한국시리즈까지 갔지만 7차전에서 현대에 졌다. 7차전에서 정민태가 7-0 완봉승을 거두는 등 무시무시한 피칭으로 현대에 우승을 안겼다. 조범현 감독은 당시 시리즈 얘기가 나오면 떠올리는 것이 있다. 이호준이었다. 페넌트레이스에서 그렇게 좋은 활약을 보였던 이호준이 한국시리즈 2차전 홈런 이후 갑자기 하강세였다.
조 감독은 고민을 했지만 이호준을 계속 4번자리에 고정했다. 그 믿음이 결국 패착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단기전 때는 오늘의 컨디션이 중요할 뿐 어제의 성적은 필요 없었다.
이호준이 우승반지를 끼기 위해서는 경험이 더 필요했다. 김성근 감독 체제에서 3개의 우승반지를 끼었다. 2012시즌을 마친 뒤 인천에 가족을 두고 마산행을 택했다.
요즘 NC 이호준 곁에는 박승호 타격코치가 있다. 이호준이 처음 SK에 왔을 때 붙잡고 많은 훈련을 시켰던 인연이 있다.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두 사람의 궁합은 좋다. 이번 시즌 무시무시한 타점을 쌓아가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SK 때 훈련을 열심히 했다. 한창 좋았을 때의 폼도 알고 해서 서로 도움이 된다. 아직도 힘이 있고 몸쪽공 도 잘 친다. 영리하고 기술이 좋은 친구”라고 칭찬했다. 박 코치가 귀띔한 몸쪽 공 대처능력의 향상의 비밀은 어깨였다. “어깨를 약간 열어서 치기 쉬운 공으로 만드는 상황판단, 눈썰미와 예측이 타점과 홈런을 만든다. 저런 타자라면 프리에이전트(FA)시장에서 누구라도 탐낼 것”이라고 했다. 이호준은 통산 300홈런에 1개만을 남겨뒀다. 앞서가던 친구 김재현은 201개에서 선수생활을 마쳤다. ‘인생도 야구도 이호준처럼’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