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선수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으면서 ‘이제 거품도 사야 한다’는 자조적 말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이런 흐름에 대응하기 위해 각 구단은 나름대로 선수 육성에 사활을 걸고 있는데, 넥센의 성공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넥센 염경엽 감독(왼쪽)이 김지수에게 타격지도를 하고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단기간·장기간·경기진행용으로 세 가지 분류
김하성·고종욱·조상우 등 직접 성장과정 체크
유망주 - 베테랑 공정한 경쟁…팀 분위기 중요
요즘 각 팀의 화두는 육성이다. 출범 초기만 해도 아마추어 야구에 투자도 하지 않은 채 연고지역선수를 무제한으로 싹쓸이하는 약탈적 방법으로 미래를 보강했던 프로야구는 그동안 여러 차례 신인지명 규정을 바꿨다. 초창기에는 연고지역에서 얼마나 우수한 선수가 많이 나오느냐의 여부에 따라 각 팀의 미래가 달라졌다. 유난히 호남에서 좋은 선수들이 많이 나왔다. 다른지역 연고권을 보유한 팀들의 불만이 높아졌다. 이에 지역연고지명 숫자는 차츰 줄어들었다. 1991년 1명으로 축소됐지만, 1996년부터 고졸우선지명 제도가 생겼다. 여전히 유망주가 많이 나오는 텃밭이 성공의 큰 요인이었다. 2000년 고졸우선지명 제도마저 사라졌다. 텃밭이 사라지자 2차 지명이 중요해졌다. 스카우트의 능력에서 미래의 성적이 갈렸다. 현대의 눈썰미가 뛰어났다. 좋은 유망주를 많이 데려갔다. 선수수급이 지명에서 발굴로 변화했다. 2010년 지역연고지명이 폐지되고 전면 드래프트가 실시됐다. 이제 아마 유망주를 놓고 10개 구단이 모두 눈에 불을 켜고 경쟁하며 미래의 희망을 찾고 있다. 지금은 발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육성이다. 유망주의 성장가능성을 잘 예측하는 시스템과 그 싹을 탈 없이 잘 키워내는 노하우가 팀의 미래인 시대다.
● 2000년대 초 성공했던 육성 시스템은 두산의 ‘화수분 야구’
가장 먼저 2군 훈련장을 갖춘 두산은 선점효과를 봤다. 적은 투자로 큰 효과를 봤다. 육성야구를 빛낸 두산은 김경문 감독 시절 큰 돈이 필요한 FA(프리에이전트)를 잡지 않아도 육성만 잘하면 전력이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화수분 야구’의 핵심은 더 많은 기회였다. “절실하게 야구하는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감독의 뚝심이 성공요소였다. 김 감독 덕분에 이천에서 훈련 중인 유망주들의 자세가 달라졌다.
1군에서의 관심과 동기부여는 선수들에게 가까이 있는 목표를 줬다. 2군에서 고생하다가 성공하는 동료들이 여럿 나오자 눈빛이 달라졌다. 유망주들의 무한경쟁은 누가 1군에 올라가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내는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감독의 뚝심과 2군 선수들의 동기부여, 경쟁이라는 3박자가 결합해 선순환 구조를 이뤄냈다. 두산의 성공 이후 각 팀은 2군 훈련장에 많은 관심을 뒀다. 투자를 했다. 투자도 없이 우수한 선수를 그냥 데려가 성공하는 시대의 끝은 해태가 보여줬다.
그러나 투자의 시대 중요한 요소를 일부 구단 프런트는 간과했다. 진짜 필요한 것은 하드웨어가 아니라 소프트웨어였다. 육성을 전담하는 사람의 노하우가 훌륭한 시설보다 더 중요했다. 유망주를 잘 키워내는 것은 돈이 아니라 방법, 2군에 대한 관심과 선수 스스로의 의욕이었다.
● 넥센의 조기육성 성공 키워드는 선택과 집중
현대 유니콘스의 유산을 넘겨받은 넥센은 육성 시스템을 잘 발전시켰다. 다른 구단들보다는 2군에서 속성재배를 잘한다. DNA가 다른 것 같다. 과하다고 할 만큼 2군 시설에 많은 돈을 퍼부은 구단보다 환경이 좋은 것도, 몸값이 비싼 유망주를 데려온 것도 아니지만 넥센은 유망주를 잘 뽑고 잘 키워서 잘 써먹고 있다.
염경엽 감독에게 그 비결을 묻자 ‘선택과 집중’을 말했다. 염 감독은 “육성이 중요하지만 모든 선수를 다 키우려고 하면 실패한다. 그렇게 할 수도 없다. 2군의 많은 선수들 가운데 단기간에 키워야 할 선수, 장기간에 준비해야 할 선수, 1∼2년 사이에 안 되면 야구를 포기할 경기진행용 선수로 분류한 뒤 테마를 가지고 육성하는 것이 노하우”라고 설명했다.
염 감독은 80여명의 선수 가운데 40명 내외만 따로 관리하면서 시즌을 꾸려간다고 했다. 이 가운데 2군 소속이지만 감독이 직접 훈련일정과 훈련 상황, 성장과정을 체크하는 선수를 몇 명으로 줄이는 선택과 집중을 한 결과 성과가 빨리 나타났다고 했다. 넥센에서 이런 과정을 거친 선수가 김하성, 고종욱, 조상우 등이다.
넥센 김하성. 스포츠동아DB
김하성은 강정호의 공백에 대비해 지난 시즌부터 준비해왔다. 고종욱은 서건창의 부상으로 기회를 생각보다 빨리 잡았지만, 준비된 시나리오에 있었다. 넥센은 다음 시즌 박병호의 공백을 메울 플랜도 가동하고 있다. 구단이 현장에 다음 시즌을 포함한 미래의 선수구성 변화를 알려줬고, 현장은 그에 따라 미리 준비하는 시스템이다.
● 유망주가 크기 위해선 가지치기가 필수
넥센의 성공요인 가운데 간과해선 안 될 것이 어린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팀의 문화다. 베테랑이 한 자리를 오래 차지하면 그 밑에서 수많은 유망주가 싹을 틔우기도 전에 시든다. MBC 시절 김재박이 유격수 자리를 10년 이상 지키는 바람에 많은 유망주가 옷을 벗었다. SK 민경삼 단장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해태도 김성한이 1루수 주전을 오래 차지하면서 이건열을 비롯한 많은 유망주들이 사라졌고 다른 팀으로 갔다.
구단과 현장은 유망주를 위해 때로는 가지치기를 해야 한다. 변화를 두려워하면 팀은 늙는다. 언젠가 한계가 드러난다. 최근 LG 엔트리에 변화가 보인다. 한동안 베테랑이 스타팅 오더의 절반을 넘었다. 올 시즌도 그렇지만 다음 시즌이 더 걱정스러워 보인다. 다년계약을 마친 베테랑을 어떻게 처리할지의 여부가 LG의 큰 숙제다. 코칭스태프와 구단 가운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역할을 맡아야 할까.
● 구단의 가지치기와 선배의 역할
다루기 힘든 것이 베테랑이다. 이들은 팀 분위기를 좌우한다. 때로는 코칭스태프보다 더 선수들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라커룸 또는 덕아웃, 때로는 경기장 밖에서 후배들에게 하는 베테랑의 행동과 말 하나에 따라 팀 분위기가 달라진다. 유망주가 성장하면 베테랑은 경계한다. 내 자리의 유망주가 잘하면 베테랑은 유니폼을 벗어야 한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그래서 베테랑은 유망주를 경계한다.
잘 되는 팀은 이 과정에서 공정한 경쟁이 벌어진다. 실력으로 후배가 선배를 이기면 된다. 그것을 장려하는 팀이 젊은 팀이다. 감독은 누구나 인정하는 기준으로 올바른 판단만 내리면 된다. 실패하는 팀은 이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나온다. 베테랑의 저항도 만만치 않다. 후배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은근하게 압력을 주면 유망주가 마음 놓고 야구를 할 수 없다. 어느 구단에는 이런 일이 자주 벌어진다. 젊은 선수가 결정적 실책을 해서 경기에 지자, 그 선수는 선배들이 무서워 라커룸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넥센은 그런 면에서 좋은 팀이다.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있다. 최소한 선배가 후배의 의욕을 꺾지는 않는다. 어린 선수가 실수를 한 뒤 고개를 쳐들고 웃으면서 덕아웃에 들어가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이런 팀 분위기, 문화를 만들어가는 역할은 주장이 맡는다. 넥센이 이택근을 좋아하는 이유다.
염경엽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유망주를 키우고 싶다면 기다려야 한다. 많은 것을 기대하면 안 된다. 현대 시절 박진만이 유격수에 고정됐을 때도 그랬다. 실수도 많았고, 타율은 1할대였다. 그런데 모두가 기다려줬다. 선배들이 야구를 잘해서 팀은 이겼고, 박진만의 실수가 눈에 띄지 않게 해줬다. 강팀이 선수를 잘 육성하는 이유는 후배들이 선배들에게서 어떻게 이기는지를 배우면서 크기 때문이다.” 결국은 좋은 선배가 후배를 키운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