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하인드 베이스볼] 투수 생명 단축하는 혹사의 함정

입력 2015-09-25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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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이만큼 던져보겠냐’는 말에 여전히 투수들의 혹사가 투혼으로 포장되고 있다. 한화 권혁(왼쪽)은 올 시즌 순수 불펜투수로 109이닝이나 소화했다. 스포츠동아DB

한화 권혁·박정진 혹사…후반기, 체력 고갈
선수생명 담보로 한 투혼, 은퇴 후에도 후유증

“시절이 그랬습니다. 에이스라면 어제 선발로 나와 8이닝을 던졌어도, 오늘 7회 이기고 있으면 ‘내보내주십시오. 제가 마무리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오늘 3이닝 던지고, 이틀 쉬고 또 선발 나간 적도 많았습니다. 팔꿈치나 어깨가 아프면 살에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리는, 이름 모를 연고를 잔뜩 바르고 던지기도 했습니다. 그럼 뜨거운 것 때문에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습니다.”(김시진 전 롯데 감독)

“동료 선발투수가 승리를 앞두고 있으면 6회부터 나갈 준비를 했습니다. 선발로 나올 때는 ‘내가 끝까지 던진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고, 완투를 못하면 미안하고 창피하게 생각이 들었죠. 투수 출신 중에 배팅볼 잘 던지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타자가 치기 좋은 공을 오히려 투수 출신이 잘 던지지 못한다는 말도 있던데, 글쎄요. 투수 출신이니까 어떤 공도 더 잘 던지지 않을까요. 제 생각에는 그만큼 팔 상태가 다 좋지 않아서일 겁니다. 저야 부모님이 워낙 부드러운 몸을 물려주셔서 참 다행입니다. 투수 출신 치고 팔이 뒤틀려 휘어있지 않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선동열 전 KIA 감독)

‘언제 이렇게 또 던져 보겠냐.’ 올 시즌 한화 권혁과 박정진의 연투가 이어질 때마다 그들을 위로하며, 또는 스스로 투혼을 다짐하며 나온 말이다. 그러나 투수의 투혼이 얼마나 위험한지, 1980년대 활약했던 투수들의 몸은 적나라하게 증명한다.

김시진 전 감독의 팔 상태는 보건복지부에서 정식 발급을 받지 않았을 뿐 장애인 수준이다. 김 전 감독은 “의사들한테 장애등급을 신청하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프로선수 출신이고 코치와 감독으로 오래 몸담은 사람인데, 세금을 더 내야지 복지 혜택을 받는 것은 더 필요한 분들께 도리가 아닌 것 같아 신청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229.1이닝∼215이닝∼269.2이닝∼196.2이닝∼193.1이닝. 1983년부터 1987년까지 김 전 감독의 투구이닝이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숫자지만, 그는 그렇게 던졌다. KBO리그 역사상 첫 100승 투수, 첫 선발 20승이라는 위대한 기록을 남겼지만 강렬한 에이스의 생명은 짧았고, 뒤틀리고 비틀린 팔이 남았다.

선수생활은 길지 않다. 누구나 코치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프로선수 때는 같은 연령층에 비해 많은 돈을 벌지만, 남은 인생이 훨씬 길다. 앞으로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모른다. 그만큼 남은 인생을 생각해서라도, 특히 가족을 위해서라면 몸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다. 프로에서 투수로 활약하는 선수들 대부분은 학창시절 에이스들이었다. ‘투수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다’는 말도 듣지만, 팀을 이끄는 에이스이기에 대개는 자부심이 높고 팀에 헌신하려는 의지가 강하다. 그만큼 곁에서 관리해주고 능력을 오래도록 발휘할 수 있도록 살펴야 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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