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베이스볼] 뮤지얼→오승환…세인트루이스와 58년 인연

입력 2016-01-15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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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환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입단했다. 1958년 세인트루이스가 한국을 방문한 뒤 58년만의 일이다(왼쪽 사진). 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오른쪽 사진 왼쪽)은 한국인 최초로 1987년 세인트루이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한 인물이다. 당시 세인트루이스 화이티 허조그 감독이 ‘러키보이’라며 총애했다. 사진제공|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스포츠인텔리전스 그룹

스탠 뮤지얼 포함 1958년 방한 최초 ML팀
이광환 지도자 연수로 ML시스템 도입 계기
최향남 포스팅 101달러 최초 한국선수 계약
오승환 ML 보장 세인트루이스맨으로 새출발


‘돌부처’ 오승환(34)이 메이저리그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에 속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니폼을 입으면서 새삼 세인트루이스와 한국의 인연이 주목 받고 있다. 한국야구사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 연결고리를 갖게 된 것은 1958년이 시초라 할 수 있다. 당시 세인트루이스가 한국을 방문해 친선경기를 펼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58년이 흐른 2016년, 이번에는 한국인 오승환이 세인트루이스로 건너갔다. 58년의 세월 속에 한국야구와 세인트루이스가 맺은 인연들을 더듬어본다.


● 1958년 세인트루이스의 방한

1958년 10월 21일. 세인트루이스가 한국에 온 역사적인 날이다. 일본 원정길에 한국을 들른 것이었지만, 카디널스는 해방 이후 한국을 찾은 최초의 메이저리그 팀으로 기록돼 있다. 그만큼 세인트루이스는 한국과 가장 인연이 오래된 팀이다. 당시 세인트루이스에는 메이저리그 당대 최고의 스타 스탠 뮤지얼이 포함돼 있었다. 7차례 타격왕과 3차례 MVP(최우수선수)를 차지한 출중한 실력 외에도 항상 미소를 잃지 않는 신사적 풍모로 ‘더 맨(The man)’이라 불리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던 슈퍼스타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치면 남자 중의 남자, ‘상남자’ 쯤으로 해석해도 된다.

이날 서울운동장(동대문운동장)에서 한국대표팀인 전서울군과 친선경기를 펼쳤는데, 2만 명의 관중이 운집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 중 최초로 야구장에서 시구했는데, 눈길을 끄는 부분은 마운드가 아닌 관중석에서 공을 던졌다는 것이다. 백스톱의 그물을 가로·세로 1m로 뚫어 그 사이로 포수 김영조에게 공을 던져줬다. 당시에는 메이저리그에서도 경호상의 문제로 대통령이 마운드에서 시구하지 않고 관중석에서 시구하던 시절이다.

전서울군의 오윤환 감독은 메이저리그 타자들이 빠른 공에 강할 것이라는 짐작으로 아예 슬로커브가 주무기인 배용섭을 선발로 내세웠지만, 1회 시작부터 1번 그라마스의 좌전안타, 2번 데이트의 우전안타에 이어 3번 뮤지얼의 우중월 2루타로 1점을 내주자 에이스 김양중을 투입했다. 김양중은 7회까지 무실점으로 막다 8회와 9회에 1점씩을 허용해 결국 한국은 0-3으로 패했다. 타선은 3안타(성기영·김희련·김양중 1안타씩)에 그쳤다. 그러나 대패를 예상했던 한국팬들은 김양중의 역투와 전서울군의 선전에 만족해했다고 한국야구사는 전하고 있다.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6회 김양중이 볼카운트 1B-2S서 스트라이크존에 꽉 찬 공을 던졌지만, 미국인 에드워드 스톤 주심의 손이 올라가지 않았다. 김양중의 다음 공이 바깥쪽으로 벗어나자 뮤지얼이 일부러 헛스윙을 한 뒤 곧바로 덕아웃을 향했다. 앞선 공이 스트라이크였다는 의미였다. 저녁에 김양중을 호텔에서 만난 뮤지얼은 “당신이 던진 그 볼이 내겐 가장 승부하기 힘든 볼이었소”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공교롭게도 2013년, 뮤지얼과 김양중은 나란히 눈을 감았다.

세인트루이스의 전설적 스타 스탠 뮤지얼(가운데)이 1958년 친선경기차 한국을 방문해 세인트루이스를 초청한 장기영(오른쪽) 한국일보 사장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세인트루이스와 전서울군의 친선경기에 앞서 한국 대통령 최초로 시구를 하는 장면이다. 서울운동장 관중석에 서서 그물 사이로 시구하는 장면이 이채롭다.



● 1987년 이광환의 세인트루이스 연수

세인트루이스는 이광환과 만나면서 다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프로야구 원년부터 OB에서 코치를 하던 이광환은 1986년 일본프로야구 세이부로 연수를 떠난 뒤 이듬해인 1987년 미국으로 건너가 세인트루이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했다. 현재 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OB맥주의 모기업이 버드와이저였는데, 당시 세인트루이스 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버드와이저가 한국시장에 진출하면서 OB 구단 추천으로 한국인인 나를 연수시켜줬던 것이다. 정식 코치로 등록돼 벤치에도 들어가고 코칭스태프 회의에도 참석했다. 스프링캠프부터 시작해 월드시리즈까지 경험하는 행운을 누렸다. 화이티 허조그 감독이 내가 선발 라인업을 짤 때 많이 이기니까 ‘러키보이’라며 계속 라인업을 맡기기도 했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OB 구단의 초청으로 1988년 1월 초 허조그 감독과 뮤지얼, 아지 스미스, 빈스 콜맨 등 세인트루이스 간판스타들이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이광환의 세인트루이스 연수는 훗날 한국야구사에 큰 전환점이 된다. 훈련방식부터 선발 로테이션 정착, 불펜 보직 확정 등 요즘에는 상식이 된 메이저리그식 야구 시스템을 한국야구에 접목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1989년 OB 감독을 맡아 야구계의 저항 속에 실패했지만, 1992년 LG 감독을 맡아 ‘자율야구’는 꽃을 피웠다.


● 최향남부터 오승환까지…한국선수들의 입성

세인트루이스와 한국선수의 인연을 따지면 최향남이 원조다. 최향남은 2009년 롯데에서 메이저리그 도전을 선언하면서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세인트루이스에 입단했다. 당시 입찰금은 101달러였지만,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미국에 진출한 최초의 선수가 됐다. 그러나 오래 가지는 못했다. 시범경기가 끝날 무렵 방출돼 LA 다저스 산하 트리플A 앨버커키에 입단했다.

세인트루이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한국선수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2014시즌 후 강정호(피츠버그), 2015시즌 후 박병호(미네소타)가 포스팅시스템을 통해 빅리그 진출을 시도할 때 응찰에 나선 구단으로 주목 받았다. 그리고 이번에 한국과 일본에서 최고 마무리투수로 활약한 FA(프리에이전트) 자격의 오승환을 품에 안았다.

이광환 육성위원장은 “세인트루이스 팬들은 야구를 정말 좋아한다. 1987년에도 매일 만원관중이었다. 한 시즌 300만 관중을 기록한다. 그곳 사람들은 일하고, 밥 먹고, 야구 보는 게 낙이다”고 소개했다. 오승환이 조용히 야구만 할 수 있는 최적의 도시라는 설명이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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