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마을 지킨 범방죽, 마을 먹인 천자샘

입력 2016-03-22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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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편 침교저수지(침교제)를 바라보며 이제는 길게 뻗은 아스팔트의 왕복 2차선 도로가 된 범방죽.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3. 남양면 침교리 범방죽과 천자샘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매월 격주 총 20회에 걸쳐 연재한다.


바닷물 막으려 쌓은 방죽 무너지기 일쑤
결국 호랑이가 방죽 쌓는 법 알려줬다고

가뭄이 와도 항시 물이 차 있는 신비의 샘
샘 안의 돌 꺼내면 말라버린다는 얘기도

사람들은 땅으로부터 먹고 살았다. 땅은 물을 먹고 산다. 땅과 물 그리고 사람들은 그리 어우러지며 세상을 일궜다. 그래서 물이 마르지 않기를 사람들은 바랐다.

때로 물은 땅과 사람들을 삼켰다. 사람들은 제대로 살아갈 수가, 살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물을 막고 땅을 넓혔다.

전남 여수 앞바다 여자만에서 흘러들어온 바닷물이 그렇게 방죽에 가로막혀 저수지로 스몄다. 질매산에서 발원해 사람들이 발 딛고 선 땅 밑으로 보일 듯 말 듯 흐른 물은 강의 지류가 되어 바다로는 향하지 못한 채 샘으로 고였다. 그래도 막힌 물은, 탁월하게 비옥하지 않지만 그래서 더욱 소중한 땅의 마을과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게 했다. 흘러서 잠시 고인 뒤 또 다시 흘러갈 채비인 물은 사람들의 생명을 이어 주었다.

막히거나 흐르거나 그도 아니면 고인 채로도 물은 그렇게 땅과 사람을 지켜줬다.

물은 막히되 막히지 않았다

전남 고흥군 남양면 침교리에는 만수위 기준 면적 36ha에 달하는 침교저수지가 있다. 92만2000여톤 저수량의 침교저수지는 거기서 인근 침교마을 등으로 향하는 수로를 통해 147.4ha의 농경지에 물을 공급한다.

저수지는 우석 김세기 선생이 197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바닷물을 흙으로 메워 912ha의 새로운 땅을 넓히면서 1977년 만들어졌다. 우석은 1960년대 초 간척의 꿈을 안고 고흥을 찾아들었다. 넓힌 땅에서 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필요했고, 간척지 매립의 꿈은 저수지를 준공한 것이다.

저수지와 그 서남쪽 방향에 자리잡은 침교마을은 남양로를 사이에 두고 있다. 왕복 2차선의 좁은 도로 가운데 침교저수지를 따라 동강면 유둔리 계매삼거리로 향하는 약 800여m 구간을 사람들은 예부터 ‘범방죽’이라 불렀다.

오랜 세월 조석으로 드나들며 언제 넘쳐 흘러들지 모를 바닷물을 막고 경지를 일구기 위해 사람들은 방죽을 쌓았다. 침교마을 임종수(84) 할아버지는 “방죽을 쌓기 전에는 바닷물 사이로 돌다리를 놓고 건너다니곤 했지라”고 말했다. 조수가 들고 나면서 돌다리가 잠겼다 드러난다는 ‘침교’(沈僑)라는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붙었다.

하지만 방죽은 이내 쓰러지고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침교마을 쪽 수로와 잇닿아 정상을 나란히 하고 선 둔덕, 양애등의 호랑이는 결국 사람들에게 방죽 쌓는 법을 알려주고 사라졌다. 임 할아버지는 양애등을 가리키며 “저 사이에서 염소 등 가축을 길렀어요”라고 일러주었다.

동서부가 모두 바다인, 최대폭이 불과 3.5km가 되지 않는 곳이 있을 만큼, 좁은 지형에 바닷물의 간기를 타고난 땅, 거기서도 바닷물을 깔고 선 이 지역은 그 흔히 불리는 호남평야와도 거리가 먼 점질의 기세가 강하다. 농작물을 풍성하게 수확하기엔 다른 호남지역에 비해 더 녹록치 않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방죽을 쌓는 일은 더더욱 멈출 수 없었다. 그나마도 삶을 이어가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염없이, 수시로 무너져 내리는 방죽을 지키려 사람들이 어이없는 노동을 감내해야 했던 까닭도 그것이다.

“저그 나타난 호랭이가 지를 따라오람서 발자국을 냄겼다 허니, 우짜믄 우리 삶을 살아가기 위해 그런 야그를 받아들인 건지도 모르지요.”

양애등을 가리키며 말하는 임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그 평생 노동의 흔적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고대의 유적처럼 천자샘은 그 유래의 신비로움을 지녔지만, 실제로도 인근 마을 사람들은 이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고흥(전남)|김종원 기자



● 하늘이 내려준 물

동쪽 여수만의 물이 차고 들어온 침교마을과 우주항공로를 이웃한 건너편 탄포마을에는 “서쪽 득량만의 해안선이 마을 앞 어구까지 들어왔다”. 그래서 한때 ‘입포’(入浦)라고도 불렸다고 고흥군지는 밝혀놓았다. 이에 따르면 탄포마을은 “마을 부근에서 숯을 구었다 하여 탄포(炭浦)라 한다”고 했다. 어떤 이는 “질매산 서북쪽 중턱에서 탄이 나오지만 사탄(死炭)이 나온다 하여 탄포라 한다”고도 말했다고 군지는 적고 있다.

그 지명의 유래야 어찌됐든, 질매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자리한 탄포마을 역시 물과는 오래고 깊은 인연을 맺고 있다.

마을 앞 너른 논과 논 사이 샘터가 있다. 그 이름을 알리는 표지석을, 마치 호위병처럼 세워둔 ‘천자(天子)샘’이다. 청록색의 이끼가 오랜 세월 빗물을 머금었던 까닭은 아닐까. 샘물은 햇빛을 사르르 받아 챙기며 그 1m여 깊이의 속내를 훤히 드러낸다.

그만큼 맑아서 샘물은 마을 사람들의 목을 축여주는 데 긴요했다. “먼 옛날 고흥 현감이 지금의 우주항공로를 지나다 마차를 세워두고 목이 말라 마셨다”(침교마을 임종수 할아버지)는 그 물이기도 하다.

탄포마을 김정남(71) 이장은 “실지로 10여년 전까지만 혀도 식음수로 써왔던 물이지요. 상수도가 들어오고 인접한 논에서 농약을 치니께 이젠 그리 마시지는 못허고요”라면서 “어릴 적 이 물을 마시며 자랐지만 한 번도 탈이 난 적이 없어요. 허허” 웃는다.

물은 ‘마르지 않는 샘’이기도 하다. 김 이장은 “물이 마른 것을 본 적이 없어요. 가뭄에도 항시 이 정도 물이 차있응께. 저 안에 돌 보시요. 저것을 들어내면 물이 죽어버린다고 어르신들 말씀이 있기도 허고. 마을 전체를 먹여 살린 물이제”라고 덧붙였다.

대체 어떤 효험일까.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 캐내어 알기 위해 성분조사 따위는 하지 않는다. 샘터를 그럴 듯하게 시멘트로 구획지어 놓은 것도 빨래와 식음의 편의를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먼 옛날 그야말로 ‘천자’의 구전은 아니더라도, 물의 소중함에 대해 탄포마을 사람들은 그렇게 묘사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야기는 이야기로만 그치지 않아서,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그렇게 지켜주고 있다.



■ 가는 길


● 범방죽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고흥 IC→고흥 방면→한천교차로에서 도양·녹동 방면 우회전 뒤 동강·오월리 방면 좌회전→우주항공로 계매교차로에서 침교리 방면 우측방향→침교리 방면 좌회전→고흥로 침교리 방면 좌회전→계매삼거리에서 선정 방면 좌회전→침교저수지


● 범방죽→천자샘

침교저수지에서 계매삼거리 방면→고흥·남양 방면 좌회전, 172m 직진 후 우회전→54m 이동 후 좌회전→우주항공로 진입→보성·침교리 방면 우측방향→탄포교차로에서 좌회전→300여m 이동→천자샘(탄포마을회관 문의)

고흥(전남) |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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