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스터시티 ‘루저들의 반란’

입력 2016-05-04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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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터시티가 3일(한국시간)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15~2016시즌 우승을 확정했다. ‘다윗과 골리앗’처럼, 만년 하위권으로 평가받던 레스터시티가 유수의 빅클럽들을 제치고 창단 132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패권을 거머쥐면서 커다란 반향을 낳고 있다. 레스터시티 수비수 웨스 모건(오른쪽 두번째)이 1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벌어진 명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36라운드 원정경기 전반 17분 1-1 동점골을 성공시킨 뒤 환호하고 있다.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꼴찌후보 예상 깨고 창단 132년만에 EPL 기적 우승

맨시티 가치 5분의 1 ‘흙수저 구단’
우승 경력 하나 없던 라니에리 감독
공장·빈민가 출신 선수들 인생역전
‘자금=우승’ 공식 깬 통쾌한 쿠데타

아주 잘 해야 꼴찌를 면하고 간신히 생존할 것이란 예상이 주를 이뤘다. ‘여우군단’ 레스터시티를 둘러싼 시즌 전망이 그랬다. 그러나 강호들이 즐비한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를 정복했다. 아주 당당하게, 오직 실력으로.

리그1(3부리그)과 챔피언십(2부리그)에선 이미 타이틀을 거머쥐었으나, ‘축구종가’ 최고의 무대를 제패한 것은 창단 132년 만에 처음이다. 종전 1부리그 최고 성적은 1928∼1929시즌의 2위. 2015∼2016시즌 내내 선두권을 지킨 레스터시티는 1일(한국시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36라운드 원정경기에서 1-1로 비겼으나, 3일 첼시 원정에 나선 2위 토트넘이 2-2로 비기면서 남은 2경기 결과와 상관없이 우승을 확정했다. 신데렐라 동화처럼 아름다웠던 결말. 대개는 실패로 점철된 인생을 보낸 레스터시티 선수단이 일군 이 엄청난 기적에 전 세계가 경의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 ‘금수저’ 누른 ‘흙수저’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요즘이다. 레스터시티는 철저히 ‘흙수저’였다. 유럽축구 몸값 전문매체 트란스퍼마르크트는 레스터시티의 시장가치(선수단 총액)를 1억2700만유로(약 1672억원)로 추산한다. 토트넘(3억1250만유로·약 4113억원), 아스널(4억4000만유로·약 5791억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4억1825만유로·약 5505억원), 맨체스터시티(5억유로·약 6581억원), 첼시(4억9575만유로·약 6525억원) 등과는 엄청난 차이다.

최근 EPL을 비롯한 유럽리그에서 통하는 공식이 있다. ‘자금=성적’이다. 이적시장이 서면 천문학적 금액이 오간다. 특급 선수를 사들이기 위한 치열한 ‘쩐의 전쟁’이다. 아스널의 아센 웽거 감독은 경제학 학위 소지자답게 “축구가 미쳤다”고 일갈하는 한편 오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해온 첼시, 오일달러를 앞세운 맨체스터시티가 돈을 물처럼 쓰는 모습을 보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비난했다. 공교롭게도 아스널 대신 레스터시티가 이 공식을 깨트렸다. 레스터시티의 역대 최고 이적료는 올 시즌을 앞두고 마인츠(독일)에서 영입한 일본 공격수 오카자키 신지의 700만파운드(약 117억원)에 불과하다.


루저, 승자가 되다!

스포츠에서 약체가 강호를 격파하는 것 이상의 드라마는 없다. 레스터시티는 비주류였다. 감독부터 선수들까지 사연이 있다. ‘아버지 리더십’ 클라우디오 라니에리(이탈리아) 감독은 30여년의 지도자 경력과 나름 높은 명성에 비해 우승은 ‘제로(0)’였다. 그래서일까. 라니에리 감독은 4월 중순까지 ‘우승’을 언급하지 않았다. “갈 길이 멀다”며 겸손한 말을 되풀이하던 그가 마침내 “이제 우승을 바라볼 수 있다”고 했을 때 모두가 열광했다.

22골로 팀 내 최다 득점자인 최전방 공격수 제이미 바디는 연봉 2000만원을 받고 8부리그 팀에서 뛴 무명이었다. 공장노동자와 선수생활을 오간 그는 2012년 레스터시티의 일원이 됐고, 지금은 주급 8만파운드(약 1억3000만원)를 받는 스타로 떠올랐다. 17골·11도움을 기록한 오른쪽 날개 리야드 마레즈도 빈민가 출신으로 길거리를 전전한 과거를 딛고 유수의 클럽들이 탐내는 특급 스타로 우뚝 섰다.

레스터시티는 시즌 초부터 선두권을 달렸다. 4-4-2 포메이션을 중심으로 동일한 전략과 전술을 고수했고, 스쿼드 구성도 거의 비슷했음에도 경쟁자들은 좀처럼 따라잡지 못했다. 평균 볼 점유율 40대60(%)에 불과할 정도로 대개는 수세적 플레이를 펼쳤는데, ‘선수비-후역습’이라는 뻔한 공식이 통했다. 알고도 막을 수 없는 팀이 돼 버린 것이다. 라니에리 감독이 선수들에게 주문한 메시지는 “가슴 속 불을 찾자!”였다. 레스터시티의 여우들은 불을 찾았을 뿐 아니라, 활활 타올랐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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