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업그레이드된 승부조작, 범죄의 재구성

입력 2016-07-22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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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프로야구는 사상 초유의 승부조작 사건으로 홍역을 앓았다. 단체스포츠인 야구의 특성상, 경기의 승부 자체를 조작하지 못하기에 불법스포츠도박 사이트의 인기 배당방식인 ‘1회 볼넷’ 등을 이용했다. 1회 볼넷이 나올지, 혹은 어느 투수가 먼저 볼넷을 범할지 등에 돈을 거는 식이었다. 조작의 범위가 작았기에 당시 가담자들은 ‘볼넷 1개쯤은’이라며 죄의식 없이 범행에 공조했다.

4년 만에 다시 프로야구가 흔들리고 있다. 이번엔 조작의 범위가 방대하다. 승부조작을 ‘설계’한 선수, 그리고 이에 따라 ‘행동’한 선수 모두 대범해졌다. 볼넷 외에 실점, 더 나아가 양 팀의 득점 합계까지 손을 쓰려 했다.

‘1회 볼넷’ 예행연습? ‘1회 실점’도 어렵지 않았다

기자는 4년 전 경기조작 파문을 취재하며 사건 관계자들에게 ‘1회 볼넷’ 조작의 실체를 들을 수 있었다. 일단 조작이 가장 쉬운 경기는 1회초 등판하는 홈경기다. 먼저 나와야 당연히 볼넷을 내줄 확률이 높아진다.

이건 기본 요건이다. 더 중요한 건 ‘상대 투수’다. 그래야 많은 배당금을 얻을 수 있다. 상대 선발투수가 약할 때, 즉 제구력이 좋은 투수가 아닐 때 배당은 올라간다. 조작을 자행하는 투수에게 ‘고배당’이 걸리면, 조작으로 얻는 수익금은 더 커질 수 있다. 실제로 박현준(당시 LG)의 조작 의심 경기에서 이런 정황이 다수 보였다.

그러나 이번엔 차원이 다르다. 물론 4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1회에 고의 볼넷을 허용한 경기도 있었다. NC 이태양은 2015년 5월9일 마산 롯데전에서 선두타자 황재균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줬다. 4구 모두 포수 김태군의 요구와는 반대로 가거나 너무 멀리 벗어났다.

이날 경기는 설계자 문우람(당시 넥센)과 브로커 조씨, 이태양 간의 ‘예행연습’이었을 지도 모른다. 검찰이 처음 조작한 경기로 지목한 5월29일 광주 KIA-NC전은 원정경기다. 이태양은 5월9일 경기 이후 중간계투로 뛰다 이날 다시 선발로 복귀했다. 이들은 범행 일주일 전 유흥업소에서 모여 ‘1회 볼넷’이 아닌, ‘1회 실점’의 구체적인 방법을 모의했다.

이태양은 선두타자 신종길에게 2구째에 어이없는 공을 던져 몸에 맞는 볼을 허용한다. 이어진 희생번트로 1사 2루. 이태양은 김주찬에게 6구만에 2루타를 허용하고 계획대로 실점했다. NC는 이날 3-13으로 완패하며 8연승을 마감했다.

무위로 돌아간 과감한 조작, 협박에 시달리다

‘무리수’도 있었다. 7월31일 마산 넥센-NC전에선 ‘4이닝 오버’라는 보다 과감한 조작을 시도한다. 불법스포츠도박에서 자행되고 있는 이 게임은 4회까지 양팀 득점의 합계가 6점 이상이 되는 지에 베팅하는 게임이다. 상대적으로 배당이 더 크기에 베팅방 운영자 최씨는 베팅액수를 2배로 늘려 2억원을 걸었다.

투수 이태양 혼자 자행하기엔 쉽지 않은 방식이다. 그러나 상대 선발이 넥센 신인 김택형으로 다소 약했고, 이태양이 가담하면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었다. 아마 5월29일 경기에서 실점이 많았던 상황을 떠올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NC 타자들이 김택형에게 5이닝 1실점으로 막혔고, 이태양도 볼넷을 4개나 내주는 등 애를 썼지만 넥센 타자들이 결정적인 득점 찬스에서 물러났다. 최씨는 이 경기로 크게 손해를 보자 이태양을 구타하기도 했다.

창원지방검찰청 공보담당 박근범 차장검사가 21일 창원시 대방로 창원지방검찰청에서 진행된 국민체육진흥법 위반혐의 관련 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 결과를 브리핑하고 있다. 창원 | 이명노 기자 nirvana@donga.com


다시 쉬운 ‘1회 볼넷’, 성공과 실패

8월6일 마산 롯데-NC전은 이들에게 손해를 메워야하는 경기였다. 다시 ‘안전’한 쪽으로 갔다. 가장 쉬운 ‘1회 볼넷’을 선택한 것이다. 이태양은 선두타자 손아섭에게 안타를 맞았으나, 2번째 타자 정훈에게 볼넷을 내주는데 성공했다. 초구부터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던진 이태양은 재차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을 던졌다. 볼카운트 3B·1S에서 던진 바깥쪽 높은 공을 심판이 스트라이크로 잡아주자, 마지막엔 다시 바깥쪽으로 완전히 공을 뺐다.

그러나 손해 본 2억원을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태양은 대가도 받지 못했고, 9월15일 마산 kt전에서 또 다시 조작에 나섰다. 이번에도 쉬운 ‘1회 볼넷’이었지만, kt 타자들이 적극적으로 스윙을 하는 등 볼넷 없이 삼자범퇴로 끝나 무위에 그쳤다.

검찰은 4경기만 공소사실에 적시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경기가 조작됐을 가능성도 있다. 증거가 충분한 상황만을 두고 기소하기 때문이다. 진화한 승부조작은 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창원 | 이명노 기자 nirvan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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