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듀, 구봉서②]병상에서도 코미디 고민한 천생 희극인

입력 2016-08-29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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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성모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 속 영정처럼 구봉서는 60년 넘도록 웃음을 안겼다. 후배들은 고인에 대해 “거장”이라고 입을 모은다. 구봉서는 휠체어를 타면서도 코미디 공연을 하고 싶어 한 천생 희극인이었다. 사진|사진공동취재단

■ 한국 코미디 대부 구봉서가 남긴 것

송해 “전후 상처받은 국민에게 웃음 준 진정한 애국자”
김병만 “선생님 보며 코미디 꿈…한국의 찰리 채플린”

웃음은 힘겨운 시대를 위로하는 희망이다. 60년 넘도록 대중에 웃음을 선사한 한국 코미디의 상징 구봉서가 마지막 가는 길에서도 남긴 메시지는 그래서 더욱 뭉클하다.

28일 빈소에는 생전 고인과 함께한 송해를 비롯해 엄용수, 김병만 등 후배 코미디언들이 찾아와 고인을 추모했다. 고인과 나눈 경험, 그로부터 얻은 격려를 꺼내놓는 이들의 말에서는 한국 코미디를 걱정하고 아꼈던 거장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고인과 동향이라 더 각별하게 지낸 송해는 “일제강점기부터 현대를 관통하면서 국민에게 희망을 준 선배”라며 “한국전쟁 뒤 상처받은 국민을 위로하는 공연으로 웃음을 준 진정한 애국자였다”고 기억했다. 엄용수는 고인에게 아들 같은 후배였다. 가장 최근 만남은 지난 7월. 엄용수는 “항상 독서를 많이 하라고 말씀하셨다”며 “가르침을 따르려 1만권의 책을 읽었다”고 했다.

고인은 실력 있는 코미디언을 발굴하는 역할도 했다. 1975년 데뷔한 이용식도 그 중 한 명. 빈소로 달려온 그는 “늘 남한테 잘 하고 주위를 돌아보라 하셨다”며 슬픔에 잠겼다.

고인이 가진 상징성은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개그맨들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정통 코미디가 멈추지 않고 이어지도록 한 주역이란 사실은 이봉원과 서경석, 강호동, 유재석 등 후배들의 면면에서도 드러난다. 김병만은 “선생님의 영화와 콩트 코미디를 보며 꿈을 키웠다”며 “고인은 코미디의 역사이고 한국의 찰리 채플린”이라고 했다.

따뜻하고 온화한 성품이었던 고인은 개그와 코미디를 향해 일침도 가했다. 2007년 한 TV인터뷰에서는 “개그프로그램이 말장난 위주의 천편일률적인 모습”이라며 “감동과 위트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인터뷰에서는 “코미디가 사회를 정화하는 역할을 못하면 그 의미와 역할은 퇴색된다”고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정통 코미디, 사회를 풍자하는 역할마저 잃은 상황에 대한 애정 어린 지적으로 들린다. 아내 정계순씨는 “완고하고 보수적이었지만 자신의 분야에서는 긍지와 자부심이 컸다”고 했다. 고인은 가족에게 “다시 태어나도 코미디를 하겠다”고 말해왔다.

고인은 19살이던 1945년 극단에 입단해 악사로 무대에 올랐다. 1958년 영화 ‘오부자’의 성공으로 ‘막둥이’라는 별칭을 얻으며 희극배우로서 유명세를 얻었다. 출연 영화가 400여 편에 이른다. 1960년대 후반 TV로 진출해 방송 코미디의 기틀도 다졌다.

그런 고인이 최근까지 후배들에 건넨 말은 “방송에 연연하지 말라”는 조언이다. 방송이 아닌 더 넓은 무대를 바라보라는 의미다. 눈을 감기 전까지 웃음을 주는 무대를 그리워한, 천생 희극인인 그를 두고 엄용수는 “농어촌에서 하는 코미디 공연 계획을 말씀드리니 휠체어를 타고 갈 수 없는 상황을 아쉬워하셨다”고 말했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이경후 기자 thiscas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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