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마을①] 아홉 마리의 용, 사나운 호랑이를 막아서다

입력 2016-10-18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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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룡마을의 옛 이름은 ‘구룡금’이다. 마을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는 설화가 내려온다. 마을의 9개 계곡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꼭 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호도에서 바라본 구룡마을의 모습이 잔잔한 바다만큼이나 평온하다. 고흥(전남)| 김진환 기자 kwangshin@donga.com

■ 15 동일면 덕흥리 구룡마을

세밀한 생활사와 풍속사 혹은 세상의 어긋난 도리에 대한 풍자.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동안 윤색과 와전의 과정을 거치기도 하지만 그나마도 이야기를 낳은 공간에서 나고 자란 어르신들의 입이 아니라면 들을 수 없다. 콘텐츠로서 다양한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대, 본래의 설화를 들여다보는 까닭이다. 넘쳐나는 대신 그만큼 사라져가는 진정한 스토리텔링 콘텐츠로서 설화의 가치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전남 고흥군은 땅과 바다가 어우러지는 반도의 토양 위에서 먼 옛날부터 이야기가 풍성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류몽인이 이 곳에서 ‘어우야담’을 쓸 수 있었던 한 배경이기도 하다. 웹툰과 애니메이션, 영화와 드라마 등 다양한 대중문화 콘텐츠의 또 다른 원형일 수도 있을 고흥의 설화를, 스포츠동아가 격주 연재한다.


마을 앞 섬 호랑이에 맞서 싸운 용
호랑이 죽고 태풍·배 사고도 줄어
승천한 아홉 용은 마을 수호신으로
구룡이라 기역자 성 씨가 잘 산다고


‘용호상박(龍虎相搏)’. 우열을 가리기 힘든 두 강자의 싸움을 일컫는 말이다. 그 승부를 쉽게 낼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용과 호랑이가 ‘좌청룡 우백호’처럼 나란히 있으면 어떤 악귀라도 막아준다고 하지만, 서로 대치하고 싸울 때는 어느 한쪽이 죽어 나가떨어질 때까지 물고 뜯는다고 한다. 예부터 용(임금)과 호랑이(힘)는 그처럼 강한 상징성과 신비로움으로 영겁의 세월 존재해왔다.

전남 고흥군 동일면 덕흥리 구룡마을에는 ‘용호상박’을 실감케 하는 설화가 고스란히 내려온다. 구룡마을의 옛 지명은 ‘구룡금’. 마을 동쪽 연못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했다고 해서 ‘구룡금’이라 불렸다. 마을에는 총 9개의 계곡이 있다. 위에서 보면 그 형상이 꼭 용처럼 보인다 해서 그리 불렀다는 설도 전해진다. 이유야 어찌됐건 마을 사람들은 부귀와 풍요를 상징하는 용을 수호신처럼 받아들이고 있다.


● 아홉 마리의 용, 마을을 지키다

구룡마을을 이야기할 때 시호도를 빼놓을 수 없다. 시호도는 구룡마을 바로 앞 무인도다. 하늘에서 봤을 때 섬의 지형이 호랑이가 죽어 있는 모양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 이장 이은기(63) 씨는 “호랑이가 살아 있는 모양이었으면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데 죽은 모양이라 그렇지 않다”고 했다. 과거 시호도 앞에서는 유독 선박 사고가 잦았다. 도화에서 나로도를 지나가는 배들은 태풍이나 자연재해 탓도 아닌데 암초에 부딪혀 침몰하는 등 자초했고, 그 피해는 마을 주민들에게 돌아갔다. 이씨는 “그게 다 시호도에 살던 호랑이의 사나운 기운 때문”이라고 했다.

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설화에 따르면 시호도에 살던 호랑이가 물이 부족해 본섬인 구룡마을로 넘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구룡금의 아홉 마리 용이 호랑이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맞서 싸웠다. 거대한 체구와 날카로운 발톱, 성난 이빨을 한 호랑이와 아홉 마리 용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는 이야기다. 싸우다 지치면 주저앉아 쉬다가 기운을 차리면 또 싸운 끝에 호랑이가 나가떨어졌다. 물과 먹이가 없던 섬에서 호랑이가 죽은 뒤 그 앞바다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던 배 사고도 줄어들었다.

마을에서 가장 연장자인 이경철(90) 할아버지는 1959년 사라 태풍이 한반도를 집어삼킨 때를 떠올리며 “당시 슈퍼태풍이 온 동네를 모두 쓸고 갔어. 옆 마을에서는 몇 명씩 죽었는데, 우리(마을)에선 아무도 안 죽었어. 마을 이름이 좋아서 그렇지”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아홉 마리의 용이 승천한 후에도 그 영험한 기운이 마을에 남아 있다고 믿는다. 김재구(80) 할아버지는 “아홉 ‘구’자에서 보듯이 ‘기역(ㄱ)’자 성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성씨보다 더 잘 산다”고 했다. 김, 강, 구, 권, 고, 길, 감씨 등이 그렇다는 설명이다. 김 할아버지는 “딱히 어떤 성씨인지 말하기 그렇지만, 현재 우리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도 ‘기역’ 성씨”라면서 “덕흥리에 3개 마을이 있는데 예부터 구룡마을이 가장 부흥했다”고 말했다.

색다른 경험, 원시체험

사라져간 호랑이는 ‘가죽’ 대신 사람들에게 또 다른 삶의 터전을 남겨 주었다. 구룡마을에서 배를 타고 3분도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자리한 시호도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공간이 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시호도를 그냥 방치하기보다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는 점에 착안해 ‘원시체험의 섬’으로 만들었다. 2010년 착공해 2013년 7월 개장했다. 움막과 사색로, 전망대, 텃밭, 뗏목, 어패류 채취장 등을 마련했다.

구룡마을 선착장에 휴대전화를 맡기고 들어가 물과 불이 없는 곳에서 실제 원시인이 되어보는 공간이다.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생한 원시체험의 무대가 준비되어 있다. 힐링, 가족체험 등 맞춤형 테마에 맞춰 이색적인 일상을 살아볼 수 있다.

마을을 관리하는 김정배 촌장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원시인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다. 인지도가 점점 높아져 2013년 개장 후 꾸준히 관광객이 늘고 있다”며 “전기, 물, 불, 술 등을 멀리하고 힐링할 수 있는 곳으로 가장 적합하다”고 말했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곳이라 최근 선착장 인근에서 패총(조개무덤)이 발견돼 호남문화재연구원이 발굴에 나서기도 했다. 김 촌장은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빗살무늬 토기 조각이 나왔다. 섬 전체가 살아있는 보고”라고 말했다.


● TIP
설화란?

사람들 사이에 오랜 시간 구전(口傳)돼 내려오는 이야기. 신화와 전설, 민담을 포괄한다. 일정한 서사의 구조를 갖춰 민간의 생활사와 풍습, 권선징악의 가치 등을 담은 이야기다.


● TIP 가는 길

남해고속도로 고흥 IC→고흥 방면→한천교차로에서 도양·고흥 방면→동강교차로에서 동강·보성·대서 방면 우측방향 우주항공로→연봉교차로에서 점암·연봉리 방면 좌회전 고흥로→점암삼서리에서 자연휴양림·도화 방면 우측방향 해창로→송산삼거리에서 영남 방면 좌회전 해창로→해창만삼거리에서 나로도·도화 방면 우회전 팔영로→옥강삼거리에서 도화·나로도 방면 좌회전 우주로→성두구룡길 따라 이동

고흥(전남)|이정연 기자 annjo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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