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 토크②] 정은표 “극단 후배 유해진, 크게 성공할 줄 알았다”

입력 2017-05-24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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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52세의 정은표는 1990년 극단 목화의 연극 ‘운상각’을 통해 데뷔했다. 27년째 연기하면서 살고 있으니 ‘삶의 반’을 연기 안에서 살아온 셈. 시작은 단순히 ‘우연의 연속’이었다. 시골 학교에 연극반이 생겼고, 연극반을 맡은 가정 선생님이 정말 예뻤다. 정은표는 그 선생님을 보려고 연극반에 들어갔다. 처음 접한 연기는 정은표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연기의 재미에 눈을 뜬 소년은 버스를 타고 도시를 오가며 청소년 극단에서 연기 레슨을 받았다. 버스가 끊기면 거리에서 노숙하거나 당구장에서 청소를 도맡으며 잠을 해결했다.

“새로운 세계를 알게 된 거잖아요. 완전히 연극에 미쳐버렸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광주에 있는 극단에 들어갔어요. 6개월 정도 생활했는데 재밌었어요. 서울예술대학교 연극과에 들어가면서 서울에 진출했죠. 그런데 제 존재감이 너무 형편 없는 거예요. 예쁘고 멋진 동기가 많아 기가 죽어 있었어요. 저에게는 열심히 연기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정말 열심히 했어요. 진짜.”

정은표는 극단 ‘목화’에 적을 두고 활동했다. 극단 목화는 정은표뿐 아니라 유해진 장영남 박희순 등 많은 스타 배우들이 거쳐간 곳이다.

“극단 활동 당시에는 정말 많은 사람이 고생했어요. 90년대 초반에는 연극배우들이 지금처럼 TV나 영화에서 각광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사람들의 보는 눈이 넓어진 거죠. 유해진이 광고 찍는 세상이 왔어요(웃음). 배우들이 살기 좋은 시대가 도래했지만, 동시에 배우가 이름을 알리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 됐죠. 개성 넘치는 사람들이 많이 나오고 콘텐츠도 다양하고 많아졌으니까요. 배우로서 정체성을 갖기 어려울 때가 있어요.”

정은표는 극단 후배들보다 한 걸음 먼저 충무로에 진출했다. 성공적이었다. 20대 후반에 동아연극상을 받고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데뷔 초 영화계에서 발을 넓히다 1997년부터는 드라마에 더 집중했다. 그 배경에는 부모님이 있다.

“처음에는 영화 쪽에서 기회가 많았어요. 그런데 영화만 하다 보니 시골에 가면 부모님이 ‘너는 왜 TV에 안 나오느냐’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에 많이 흔들렸죠. 부모님이 보시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에 드라마로 발길을 옮겼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어 많은 드라마에 출연했어요. 문제는 다작을 하더라도 배우로서 중심을 잡고 성장을 했어야 했는데, 욕심을 내다 보니 안 해도 되는 드라마까지 선택하게 되더라고요. 제 모든 선택에 불만도 없고 후회도 없지만, 약간의 아쉬움은 남아요.”


극단 목화를 언급하다 진한 후배 사랑을 드러내기도 했다. 긴 무명의 시간을 거쳐 온 연극배우의 애환을 잘 아는 선배이기에, 누구보다 후배들의 성공을 축하했다.



“(유)해진이 멋있잖아요. 성공할 줄 알았어요. 요즘 영화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부럽기도 해요. 연극 ‘이발사 박봉구’를 함께한 오정세도 정말 좋아해요. 단역으로 데뷔해서 지금은 주인공도 하는 친구인데 오디션을 엄청 보고 다녀요. 작은 역할이라도 마음에 들면 감독을 먼저 찾아간대요. 진짜 멋지지 않나요.”

정은표는 연극을 자신의 “고향”이라고 표현했다. 그 또한 연극 출신 배우들이 그렇듯 무대로의 회귀를 꿈꿨다. 정은표는 무대만의 매력으로 배우에게 주어지는 ‘무한대, 무한계의 공간’을 꼽았다.

“무대에서 에너지를 발산하고 나면 시원해요.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연극도 하고 싶은데 시간 될 때 잠깐 하고 오는 식으로 하고 싶진 않아요. 프로 같지 않잖아요. 요즘 더블 캐스팅과 트리플 캐스팅이 많은데 저는 원 캐스팅으로 온통 제가 다 하고 싶어요. 제안이 들어오면 그것부터 먼저 확인하죠. 백지로 가서 순수한 마음으로 연극하고 싶어요. 드라마와 영화에서는 배우의 존재가 미미해요. 한계도 있고요. 하지만 연극은 배우가 조율할 수 있어요. 오롯이 감정을 끌고 가면서 관객들을 그 감정에 들여오면 비로소 완성되죠.”

순수함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정은표. 50대에도 연기 열정은 20대만큼이나 뜨겁다. 그의 입에서는 단련, 담금질, 공부 등의 단어가 수차례 흘러나왔다.

“온 세월과 갈 세월이 비슷하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면 너무 뻔할 것 같아요. 담금질을 더 해야죠. 학교도 고민하고 있어요. 연극 시절 남대문 시장에서 일을 마치고 귀갓길에 2~3시간씩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어요. 다양한 사람들을 제 안에 캐릭터로 저장해두는데 연기할 때 자양분이 되더라고요. 요즘은 아쉽게도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 뒤통수밖에 안 보여요. 얼마 전에 일본에 다녀왔는데 새롭게 느껴지더라고요. 사람들의 일상이 한국과 정말 달라요. 일본에 유학을 다녀와야 하나 싶어요. 배우는 ‘배우는’ 직업인 것 같아요. 끊임없이 배워야죠.”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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