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구는 영화 ‘불한당’을 통해 강렬한 캐릭터를 연기하면서 배우로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머물러 있지 않기 위해 다시 그는 ‘살인자의 기억법’을 선택했다. 사진제공|쇼박스
한때 습관처럼 촬영하고 또 끝내고…
최소한 나한테는 쪽팔리지 말아야
고민 속에 선택한 ‘살인자의 기억법’
고생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지만
배우로서 정체되는 것이 더 무서워
이번에도 난 캐릭터로 남길 원한다
설경구의 눈을 다시 들여다본 건 2006년 봄이었다. 영화 ‘열혈남아’의 막바지 촬영 무렵, 연출자 이정범 감독의 초대로 현장인 서울 신림동의 한 노래방을 찾았다. 설경구는 지난 몇 달 동안 이어진 작업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진한 터였다. 촬영을 마치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동안 그의 눈을 들여다봤다.
노릿하게 굽는 삼겹살 냄새와 함께 소주 한 잔을 권하는 그의 눈은 깊어 보였다. 냉혹한 조폭, 하지만 내면의 인간적 따스함을 간직한 남자를 연기하며 그 눈빛마저도 캐릭터를 닮아가려고 애쓴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2000년 영화 ‘단적비연수’를 통해 알게 된 설경구의 눈을 짧지 않은 세월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 “배우는 내 직업이 아니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미드나잇스크리닝 부문 공식 상영장인 프랑스 칸 팔레 데 페스티벌의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설경구는 눈시울을 붉혔다. 임시완, 김희원, 전혜진 등 영화 ‘불한당’의 동료들과 함께 7분 동안 이어진 관객 기립박수에 화답하는 순간이었다. 레드카펫 위에서 다양한 포즈로 보는 이들을 즐겁게 했던 그는 연방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내며 환하게 웃던 모습을 거두고 이내 감회에 젖었다.
돌이켜보면 1995년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 출발점이었다. 2년 전 스승이기도 한 최형인 한양대 교수가 이끄는 극단 한양레퍼토리의 연극 ‘심바새매’로 데뷔한 뒤였다. 당시 연출부였던 한양대 연극영화과 동기생 심광진 감독(‘불후의 명작’ 연출)이 권유한 오디션에 응해 주인공 이정현의 사라진 오빠 친구 역을 연기했다. “뭣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극단 학전 김민기 대표의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과 ‘모스키토’ 등으로 공연계에서 조금씩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배우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1998년 임상수 감독의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어쩌면 그의 인생을 바꾼 무대가 되었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의 촬영을 마친 임상수 감독은 “몸무게를 10kg만 줄이면 어떠냐”고 했다. “그러면 영화계 콜이 많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무턱대고 살부터 뺐”고 이후 출연 섭외도 제법 받았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에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한 그는 이듬해 박종원 감독의 ‘송어’ 오디션을 봤다. 그 자리에서 “감독이나 보고 가라”는 조감독의 말에 “긴 테이블 구석에 존재감 없이 앉아 있었다”. 박종원 감독은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어디선가 막 보고 오던 길이라 했다. 주연배우 김여진 등을 칭찬하던 박 감독은 “기브스에 안경 끼고 나온 애도 제법 하던데”라고 말했다. 조감독은 설경구를 가리키며 “그 분이 저 분”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아직 무명의 때를 벗지 못하고 있었다. 얼굴에서도 강한 개성은 묻어나지 않았다. “배우를 직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던 때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선 자로서 책임감만은 버릴 수 없었다. 그건 곧 실력이었다. ‘박하사탕’ 이후 6일 개봉한 ‘살인자의 기억법’에 이르기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는 바로 그것을 설명해주고 있다.
● “높은 산에 오르는 법”
김영하의 동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살인자의 기억법’은 이미 2년 전 촬영했던 작품이다. 개봉 시기를 엿보다 최근 선보이고 있다. 설경구는 “올해는 ‘불한당’과 함께 내게 아주 중요한 두 편의 작품을 만나게 해줬다”고 말할 만큼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대단해 보였다. 시나리오를 보고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다”는 그는 “쉽게 산 수년의 시간 때문에 힘들게 일하고 싶었다”고 털어 놓았다.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이후 ‘공공의 적’과 ‘실미도’(이상 감독 강우석)를 거쳐 2004년 ‘역도산’(감독 송해성)까지 몇 년의 시간은 그에게 흥행의 단맛과 함께 육체적·정신적으로 힘겨움을 안겨주었다. 강렬한 몇몇 캐릭터를 이때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래서 더욱 쉽지 않았다.
“지쳐 있었다. 주변에서도 안쓰럽다고 말하더라. 스스로 지치니 날 보는 이들도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이젠 좀 편하게 하라는 권유도 많았다.”
결국 “(작품에)쉽게 접근하고 (연기하기 비교적)쉬운 캐릭터만 습관처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습관처럼 작품을 결정하고 촬영하고 또 끝내고…. 하지만 찜찜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 공허해졌다. 부끄러운 내 모습도 봤다. 그래서 생각했다. 최소한 나한테는 쪽팔리지 말자.”
그런 고민의 시간 속에서 ‘살인자의 기억법’을 만났다. “도저히 고생 안 할 수 없는 작품”임을 알고도 선뜻 출연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연쇄살인범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두고 이미 그 자신이 말했듯, “높은 산”이기도 했다.
“힘들다. 내려와 또 다시 올라야 하는 게 산이기도 하다. 높은 벽과도 같다. 하지만 결국 뛰어넘어야 한다.”
산에 오르고 벽을 뛰어넘는 한 방편으로 설경구는, ‘고무줄 몸무게’라는 비유가 온당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지금껏 “살을 찌우고 빼고 다시 찌우고 빼”는 고통스런 과정도 때로 반복했다.
“멍청한 거지. 그래도 진짜 이게 하고 싶다 하면 어쩔 수 없다. 해야 한다. 안 그럼 속이 터진다. 기회를 놓치면 화도 날 것 같고. 그래도 살을 뺄 땐 건강이 나빠지지 않는다. 가끔 비워주기도 해야 한다. 그 희열이 있다. 하하!”
● ‘꾸꾸’와 ‘울꾸’…비로소 설경구의 눈을 다시 본다
그런 것일까. 결국 배우는 “자신을 비워 희열을 느끼는” 존재일까. 설경구는 정체에 대한 두려움을 말했다.
“정체되는 건 무섭다. 존재의 의미가 없어지는 거니까. 존재감을 느끼지 못할 땐 정말 슬플 것 같다.”
그래서 그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벽을 넘지 못하니까”. “나를 사랑하는” 법은 “캐릭터에 대한 연민”으로 드러난다. 그것 하나로 “연기하는 의미”를 찾는다는 그는 “요즘엔 캐릭터의 얼굴을 생각한다”고 말했다. 연기하는 캐릭터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이 있을 터이고 “그걸 생각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의 큰 차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설경구는 “캐릭터로서 남길 원한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에게 최근 새로운 별칭이 생겼다. ‘꾸꾸’(설경구의 ‘구’를 격하게 발음) 혹은 ‘설탕’이란다. ‘불한당’ 이후 팬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울꾸도 있다. ‘우리 경구’! 하하!”
이쯤 되면 “캐릭터로서 남길 원한다”는 우선적 목표는 실현된 셈이다. ‘불한당’을 본 팬들이 전해오는 손편지 속 우울함의 사연 뒤 “활력을 되찾았다”는 감사의 마음에 이르면, 설경구는 “드린 것도 없는데 과분할 뿐이다. 그렇게 팬들과 서로 응원을 주고받는다”며 “배우의 보람”을 생각한다.
다시 그의 눈빛을 본다.
2006년 봄처럼 여전히 깊어 보이는 눈. 하지만 이전과는 또 다른 ‘깊은 무엇’이 담겨 있었다. 그 ‘무엇’을 발견해내는 일, 관객의 즐거움이다. 그렇다면 설경구는 배우로서 온전한 “보람”을 성취하고 있는 것일 터이다.
● 설경구
▲1968년 5월1일생
▲한양대 연극영화과 졸업
▲1993년 연극 ‘심바새매’로 데뷔
▲1996년 ‘꽃잎’으로 스크린 데뷔, 록뮤지컬 ‘지하철 1호선’
▲2000년 ‘박하사탕’으로 본격 주연 및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
▲2002년 ‘공공의 적’으로 청룡영화상 등 8개 영화상 남우주연상, ‘오아시스’ 베니스 국제영화제 초청, ‘광복절특사’ 등
▲2003년 ‘실미도’로 첫 1000만 영화 주연
▲2005년 ‘공공의 적2’
▲2009년 ‘해운대’로 두 번째 1000만 영화
▲2012년 ‘타워’, 2013년 ‘감시자들’ 등
▲2017년 ‘불한당’으로 칸 국제영화제 초청
윤여수 전문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