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혁신의 ‘빙상의 전설’] 투혼의 서이라, 최선 다한 그가 왜 비난 받아야 하나

입력 2018-02-1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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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트랙 서이라는 17일 남자 1000m에서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대표팀의 동반 메달 획득 실패와 여러 오해가 겹치면서 네티즌의 비난을 사고 있다. 그러나 서이라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서이라에게 쏟아지는 악플 세례

지난 17일 벌어진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전 결과를 두고 인터넷이 뜨겁다. 남자 쇼트트랙 1000m 결승에는 서이라, 임효준(대한민국)과 함께 사무엘 지라드(캐나다), 존 헨리 크루거(미국), 헝가리의 류 사오린 산도르(헝가리)가 출전했다.

3위로 출발한 임효준이 선두권인 지라드와 크루거를 추월하려다 실패하면서 경기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임효준을 앞선 서이라가 인코스로 몇 차례 추월하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하면서 서이라를 제치고 나가려던 임효준도 제때 빠져나갈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이어졌다. 한 바퀴 반을 앞두고 서이라가 다시금 추월을 시도하려는 상황에서 뒤에서 달리던 류 사오린 산도르가 인코스 추월을 시도하가다가 서이라를 걸고넘어지면서 임효준까지 함께 미끄러지는 불상사가 벌어졌다. 서이라와 임효준이 결승선을 향해 달렸지만 결과는 서이라와 임효준이 3, 4위. 금메달은 물론이고 동반 메달 획득까지 노리던 대한민국 대표팀과 국민들로선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 상황을 두고 인터넷과 SNS에서 뜨거운 논란이 벌어졌다. 임효준보다 실력이 떨어지는 서이라가 빨리 임효준에게 자리를 비켜주어야 했다는 의견이 다수의 지지를 받았다. 더러는 황대헌까지 대한민국 선수 셋이서 준준결승을 치렀을 때 셋 중 제일 실력이 떨어지는 서이라가 양보해서 황대헌이 올라왔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심지어 같은 한체대 출신인 임효준과 서이라가 학연에 따른 짬짜미로 황대헌을 탈락시켰다는 소설도 있다.

서이라의 인스타그램에도 악플과 비아냥의 댓글이 서이라를 격려하는 댓글을 압도하며 수천 개가 달리고 있다. 오히려 서이라와 임효준을 걸고넘어진 산도르의 SNS에 격려의 댓글이 많은 상황이다.

나가노 올림픽 당시 전이경.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20년 전 나가노올림픽 여자 1000m 결승전

이번 17일 1500m 경기는 20년 전 일본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서 벌어졌던 여자 1000m를 연상케 했다. 당시 결승전에 진출한 선수는 전이경, 원혜경(한국), 양양 A와 양양 S(중국)였다. 경기 초반 탐색전에 이어 중국의 양양 S가 선두로 나서고 원혜경이 2위, 양양 A가 3위, 전이경이 4위로 달렸다. 그런데 4바퀴를 남겨두고서 양양 A가 원혜경을 추월하여 2위로 올라서면서 긴장감이 고조된다. 쇼트트랙에서 같은 나라의 선수들이 레이스 중반 이후 1, 2위를 차지하고서 스피드를 올리기 시작하면 뒤의 선수들이 추월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한 선수가 인코스를 막고, 다른 한 선수가 아웃코스를 막으면 뚫고 들어가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까지 4위로 체력을 비축하고 있던 전이경이 나선다. 2바퀴를 앞두고 스퍼트를 내기 시작해 마지막 바퀴의 종이 울리는 사이 곡선 주로에서 중국의 양양 S를 인코스로 제치고 2위로 올라선 전이경은 마지막 바퀴에서 양양 A 선수와 동일 선상까지 올라선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인코스만을 노리고 있던 전이경은 발을 내밀며 결승선을 향한다.

당황한 중국의 양양 A 선수가 전이경의 팔을 잡고 늘어지면서 전이경은 미끄러지지만, 전이경의 스케이트 날이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고 자신의 승리를 직감한 그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로 두 손을 번쩍 들고 환호한다.

동계올림픽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승 가운데 하나로 회자되는 명승부로 17일 남자 1000m 결승전과 절정까지는 유사한 내용이었지만 결말은 전혀 달랐다. 왜일까?

당시 1000m는 중장거리 경기로 초반 탐색전이 있었지만 요즘 1000m는 탐색전 없이 스타트 이후 짧은 시간 안에 승부가 결정 나는 단거리 경기가 됐다. 한국 남자대표팀으로선 초반 기선제압에 실패하고, 이어 임효준의 추월 시도가 실패한 것이 첫 번째 패착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요인은 20년 전엔 경기를 뛰던 선수가 네 선수뿐이었지만 이번엔 헝가리의 산도르가 있었다는 것이다. 산도르는 월드컵 1000m 랭킹 1위를 차지할 정도의 뛰어난 실력을 가진 강자로 결승전에서 20년 전 전이경과 같은 대역전극을 노리던 이가 바로 그였다. 무리하게 인코스 추월을 시도하다가 서이라를 걸고넘어지지 않았다면 시상대 가장 윗자리에 서는 건 산도르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가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서이라가 짬짜미나 밀어주기를 해야 했나

서이라에게 악플을 남기는 이들이 바라던 시나리오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준준결승에서 서이라 대신 황대헌이 올라오거나 결승전에서 임효준에게 앞길을 양보해서 임효준의 대역전승에 일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몇 십 년간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적폐로 지적받아온 짬짜미이자 에이스 밀어주기다. 무슨 사건만 터지면 파벌싸움, 파벌싸움 십 년 넘게 비판을 하면서도 정작 파벌싸움의 가장 나쁜 면을 답습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금메달을 따길 바라니 서이라 본인의 성적은 포기하라고 전체주의적인 억압을 가하는 것이다.

쇼트트랙은 국가대항전 이전에 개인 경기이다. 그 누구도 서이라에게 다른 이를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그래서 코칭스태프도 선수들에게 별다른 작전을 지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부 네티즌들은 코칭스태프가 작전을 지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하고 있다. 입장을 바꿔 본인에게 이런 불이익을 감수하고 희생하라고 공권력이나 상부가 지시한다면 “네” 하고 받아들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쇼트트랙이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지도 벌써 26년. 사람이었으면 이미 성인이 되고도 남을 나이다. 하지만 아직도 판정 시비가 있고, 그에 따라 네티즌들의 설전과 사이버테러도 여전하다. 오죽했으면 캐나다의 킴부탱이 경찰에 신고했을까? 판정 시비 근절과 규정 완비는 국제빙상연맹의 몫이지만 성숙한 관전 문화는 네티즌들의 몫이다. 보다 성숙된 자세가 필요하다.

빙상 칼럼니스트·‘빙상의 전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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