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p Of Life, 나의 월드컵] ⑥ 최주영 전 축구대표팀 의무팀장 “포르투갈전 앞둔 박지성 부상, 지금 생각해도 아찔”

입력 2018-05-04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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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주영 전 축구국가대표팀 의무팀장은 1998년 프랑스월드컵부터 2010년 남아공월드컵까지 태극전사들과 동고동락했다. 부상자들을 보살피다보면 좀처럼 쉴 틈도 없는 극한직업이지만, 건강을 되찾아 그라운드에서 펄펄 나는 선수들은 그에게 큰 보람도 안겼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태극전사가 그라운드에 쓰러지는 순간, 누군가 쏜살같이 달려간다. 선수만큼이나 빨리 뛰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선수 상태를 파악하고, 스프레이를 뿌리고, 벤치를 향해 수신호를 보낸다. 오랜 시간 낯익은 풍경이었다. 주인공은 최주영(66) 전 축구대표팀 의무팀장. 2012년 2월 퇴임하기 전까지 그는 대표팀과 18년간 동고동락했다. 현재는 스포츠재활센터의 원장이다.

카타르배구대표팀에서 트레이너로 일했던 그가 처음 축구와 인연을 맺은 건 1994년 여름, 은사의 소개 덕분이다. 그 후 한 눈 팔지 않고 한국축구를 위해 온 몸을 바쳤다. 그가 현장을 지킨 각각 4번의 월드컵·올림픽·아시안게임·아시안컵을 합치면 300경기가 넘는다. 부상 선수를 치료하고, 부상당하지 않게 예방해줬던 그의 손길엔 수많은 에피소드가 녹아있다. 그의 육성을 통해(1인칭) 월드컵의 추억을 소환해본다.

1998 프랑스 월드컵 벨기에전 당시 이임생.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3개 대회 연속 붕대 투혼

내가 처음 참가한 1998년 대회부터 ‘붕대 투혼’이라는 얘기가 나왔다. 사연인즉, 우리 팀의 주요 선수가 눈두덩이 부위를 다쳐 붕대를 감고 뛰었는데, 그게 공교롭게도 3개 대회 연속으로 이어졌다.

1998년에는 이임생이었다. 네덜란드(2차전)에 대패한 뒤 감독이 경질된 상태에서 맞은 3차전 상대는 벨기에였다. 포기할 수 없는 경기였다. 먼저 골을 먹은 우리 선수들은 동점골을 향해 죽어라 뛰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임생이 부상당했다. 피가 철철 흘렀다. 경기장 밖에서 응급처치를 했다. 하지만 특수 붕대가 아니라 일반 붕대였다.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감고 들어갔지만 붕대가 자꾸 풀렸다. 주심이 다시 붕대를 감으라고 했다. 뛰니까 또 풀렸다. 선수는 뛰고 싶었지만 풀리는 붕대 때문에 집중을 못했다. 나는 너무 속상했다. ‘특수 붕대만 있었어도…’ 하는 안타까움이 너무 컸다.

2002년엔 2가지 종류의 붕대를 준비했다. 유럽에서 많이 사용하던 그물(망사)로 된 것과 한쪽 면에 껌이 붙어있어 머리카락에 착 달라붙는 붕대, 이렇게 2개를 챙겼다. 2차전 미국전에서 황선홍이 다쳤다. 미국 진영이어서 골문 뒤로 옮겼다. 피가 많이 났다. 투지가 불탄 황선홍은 빨리 조치해달라고 나를 재촉했다. 마음이 급했다. 급한 대로 껌이 붙은 붕대를 맸다. 야심 차게 준비했던 망사 붕대가 아니었다. 볼은 우리 진영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빨리 들어가기 위해 황선홍은 하프라인 부근까지 뛰었다. 그 사이 우리가 골을 먹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조금만 더 빨리 조치를 해줬으면…’ 하는 미안함과 죄책감이 밀려왔다. 다행히 후반에 만회골을 넣어 비겼지만, 황선홍의 상투를 튼 것 같은 붕대를 볼 때마다 지금도 찡해진다.

2006년 월드컵을 앞두고는 ‘이번에는 누가 붕대 감을 것 같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물론 농담이었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이번에는 누가 다치든 망사를 씌우겠다고 다짐했다. 최진철이 3차전 스위스전에서 상대와 부딪혀 부상당했다. 이번에는 지난번과 달랐다. 침착하게 행동했다. 망사 붕대로 깔끔하게 조치를 했다.

붕대 투혼은 3개 대회로 막을 내렸다. 2010년 대회를 앞두고도 부상 염려가 많았지만 다행히 큰 부상 선수가 없었고, 원정 첫 16강이라는 쾌거를 이뤘다.

2002 월드컵 포르투갈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박지성.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박지성의 왼 발목 부상

2002년 6월 10일 미국과의 2차전. 전반 38분경 상대에게 발목을 밟힌 박지성이 쓰러졌다. 더 뛰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이미 선제골을 내준 상황에서 분위기는 침울했다. 안정환의 동점골로 비겼지만 관심은 ‘박지성이 3차전에 뛸 수 있느냐’로 모아졌다. 포르투갈전은 16강 진출 여부가 걸린 한판이었다. 다친 부위에 부기가 있었다. 부기는 하루 만에 빠지지 않는다. 아무도 장담 못했다. 아찔했다. 그 3일간 피를 말렸다.

다행히 다음날 부기가 많이 빠졌다. 오후에 테이핑을 한 채 개인훈련을 했다. 히딩크 감독에게 보고했다. 감독은 3차전 하루 전날인 13일 오전에 테스트를 해보자고 했다. 그 때 뛸 수 있어야 오후 전술훈련이 가능했다. 핌 코치와 함께 박지성을 승용차에 태우고 몰래 훈련장으로 가서 테스트를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감독에게 오후 훈련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마음을 놓지 못한 건 오후 훈련 이후 다음날 아침에 이상이 없어야 했다. 경기 당일 아침에 박지성에게 전화를 걸었다. 괜찮다고 했다.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다. 심리적인 부분만 안정되면 괜찮을 것 같았다. 불안한 마음이 없어야 경기력을 발휘한다. 감독이 고민한 부분은 ‘선발이냐 교체냐’였다.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면 교체 카드 한 장을 버릴 수도 있었다. 다행히 박지성은 몸도 마음도 불안감을 씻어낸 상태였다. 결국 포르투갈전에 선발로 나섰다. 그게 월드컵 역사에 길이 남을 골로 이어졌다. 그것도 다친 왼발로 터뜨린, 16강을 확정한 결승골이었다.

2002 월드컵 포르투갈전 당시 이영표.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이영표 재활 과정에서 빚어진 해프닝

2002년 월드컵 개막 직전 들려온 가장 안타까운 소식은 훈련 중 당한 이영표의 부상이었다. 초음파 진단 결과 종아리 부위가 12㎝ 이상 찢어졌다. 최소 3주 이상이었다. 모든 신경을 재활에 쏟았다. 기분 좋게도 의학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회복이 빨랐다. 1, 2차전에서 못 뛰었지만 3차전부터 선발로 투입됐다. 그런데 재활 과정에서 히딩크 감독이 얼마나 애가 탔는지를 알 수 있는 일이 있었다.

핌 코치의 네덜란드 친구가 월드컵을 보기 위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의 직업은 물리치료사였다. 히딩크는 나와 월드컵을 앞두고 정식으로 영입한 네덜란드 출신의 물리치료사 몰래 핌의 친구에게 이영표의 상태를 보게 하고, 치료를 맡겼다. 이영표가 절실했던 히딩크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은 건 잘못이었다.

소문을 듣고는 자존심이 상했다. 히딩크에게 따지러 갔다. 그런데 그가 선수를 치며 미안하다고 했다. 너무 급했다고 했다. 그렇게까지 나오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감독이 얼마나 급했으면, 이영표가 얼마나 필요했으면,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존심을 접어두기로 했다. 한국대표팀을 위해서는 내 자존심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히딩크는 고맙다며 어깨를 감쌌다. 그 때 몰아붙이지 않은 건 잘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덜란드 출신 물리치료사와는 며칠간 불편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어쨌든 그런 해프닝 속에서 이영표는 재활에 성공했고, 결국 포르투갈전에서 박지성의 결승골을 돕는 크로스를 성공시켰다.

2002 월드컵 이탈리아와의 16강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한 안정환.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 안정환의 찢어진 테이프

2002년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 상대가 강하긴 했지만 우리 분위기도 좋았다. 경기를 앞둔 라커룸에서 난 안정환을 위해 테이핑을 해주고 있었다. 그런데 절반쯤 감기던 테이프가 쭉 찢어지고 말았다. 불길했다. 징크스라는 생각을 지우고 싶었다. 감던 테이프를 모두 풀었다. ‘테이프 질이 안 좋다’며 혼자 투덜거렸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테이핑 했다.

전반에 페널티킥 찬스가 났다. 그런데 안정환이 실축했다. 모두가 얼어붙었다.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혹시 테이프가 끊어진 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하는 미안함이 밀려왔다. 고개 숙인 안정환을 위해 위로를 해주고 싶었다. 후반전에 나갈 때 조용히 얘기를 건넸다. “정환아, 즐겨!” 들었는지는 몰라도 그게 기운을 준 것이었을까. 안정환은 연장 골든골로 영웅이 됐다. 월드컵 이후 우여곡절 끝에 소속팀인 페루자(이탈리아)로 가지 못하고 일본에 진출한 안정환이 2002월드컵에서 기억에 남는 인물로 내 이름 석자를 꼽았을 때,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마웠다.

최주영 전 축구국가대표팀 의무팀장.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꾀병 의심 받은 이천수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파주 NFC에서 훈련을 할 때다. 이천수가 연습 도중 발목을 다쳤다. 걷지 못할 정도였다. 결국 업혀서 나왔다. 응급치료를 했다. 이틀 정도 치료를 한 뒤 많이 좋아졌고, 필드에서 재활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히딩크 감독이 갑자기 나를 불러 이천수가 꾀병을 부리고 있다고 했다. 업혀 나왔던 선수가 이틀 만에 완치될 수가 없다는 게 꾀병의 판단이라고 했다. 그 날 저녁 미팅을 했는데, 그 자리에서도 똑같은 말을 했다. 부화가 난 나는 탁자를 손으로 내리쳤다. 꽝 소리에 모두들 놀랐다. 치료를 잘했다는 칭찬은 못할망정 꾀병으로 몰고 가느냐고 나는 소리를 질렀다. 순간 침묵이 흘렀다. 그 때 히딩크가 손으로 끝이라는 동작을 취하면서 나의 어깨를 감쌌다. 믿겠다는 표시였다. 다행이었다. 자칫 한 명의 선수가 감독의 눈 밖에 날 뻔했던 순간이었다. 이천수는 누명을 벗었다. 하지만 당시 그 얘기를 전하지 않았다. 혹시나 감독에 대한 믿음이 사라질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 최주영


▲생년월일=1952년 5월 2일

▲출신교=신구대학 물리치료학

▲경력=카타르배구대표팀 트레이너(1982~1991년), 대한축구협회 의무팀장(1994~2012년), 최주영스포츠재활클리닉 원장(2012년~현재)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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