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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스토리’의 배우 김희애는 “촬영하는 동안 내 자신에 실망도 하고 반성도 했다”고 돌이켰다. 그 어려움 끝에 그는 자신의 연기 인생을 대표할 작품을 얻었다. 사진제공|YG엔터테인먼트
외모 신경 안 쓰고 인물 집중…스타일링도 고증에 가까워
걸크러시? 아들 둘이라 익숙…배우 엄마 아직 신기해해
정상적인 삶 살아야 좋은 연기 나와…조심하면서 살았죠
배우 김희애(51)는 “큰 강을 건넌 기분”이라고 했다. 배우로 살아온 35년을 통틀어 중요한 기점이 되는 순간을 영화 ‘허스토리’를 통해 맞았다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꺼낸 말이다. 마지막 촬영을 마친 뒤 분장실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눈물을 쏟아냈다는 그가 배우 인생의 대표작으로 기억될 영화로 관객을 찾아간다.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배우이지만 김희애는 늘 영화를 향한 갈망을 품어왔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마땅히 출연할 작품이 없는 게 현실. “우리(여배우)가 참여할 영화가 너무 없으니까 우스갯소리로 커트(머리)라도 하고 남자 역을 맡아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도 나눴다”고도 했다.
“그렇다고 여배우를 위한 여성 캐릭터의 영화를 만들어 달라, 그런 영화를 봐달라는 게 아니다. 다만 영원한 게 없는 세상이니 점차 새로운 바람이 불어 우리가 나설 영화도 늘어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다.”
김희애의 이런 바람은 서서히 이뤄지고 있다. 바람을 일으킨 주역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이다. 27일 개봉하는 ‘허스토리’(감독 민규동·제작 수필름)는 김희애의 인생에도, 최근 한국영화 흐름에도, 더 나아가 우리가 겪은 역사와 그 피해를 되새기는 차원에서도 선명하게 기록될 작품이다.

영화 ‘허스토리’에서의 김희애. 사진제공|NEW
● “여배우·여자 타이틀 떼고 오직 한 인물로”
개봉을 며칠 앞두고 만난 김희애는 “연기자로 오래 살았으니 어지간한 일에는 끄덕하지 않는다”면서도 “내가 영화를 찍으며 느낀 한 인간의 승리와 용기, 통쾌함이 관객에 전달되길 바란다”고 했다.
알려진 대로 영화는 1992년부터 6년간 일본군 전쟁 피해여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벌인 관부재판 실화를 다룬다. 김희애가 맡은 문정숙이란 인물의 실제 모델은 당시 모든 재산을 털어 피해 할머니들을 도운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이다. 김희애는 김 회장이 한창 활동하던 당시 사진들을 구해 외모와 의상까지 그대로 따랐다. “스타일링이라기보다 고증에 가까웠다”고 했다.
“김문숙 여사님이 올해 93세이다. 지금도 정정하시다. 선생님께 조금이나마 선물이 되길 바란다. 사실 이번 영화는 외모에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오직 그 역할로서, 그 인물로 보여야 했다. 나에게는 비로소 ‘여배우’나 ‘여자’ 같은 위치를 떼어내고 오직 한 인간으로 보일 수 있는 캐릭터이자 연기였다. 담담하지만 씩씩하게 하고 싶었다.”
영화로만 본다면 김희애는 그간 정적인 인물을 주로 소화해왔다. 이번 영화에선 앞선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강렬한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부산에서 성공한 여행사 대표라는 설정의 영향도 있지만 ‘일본에게 꼭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결심 아래 피해 할머니들을 연대시키는 모습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알던 ‘우아한 김희애’가 맞나 싶을 정도로 강한 면모를 과시한다. 걸크러시의 매력도 상당하다. 이미지 변신에도 성공했다.
“걸크러시? 하하! 아들 둘을 키워서 걸크러시는 익숙하다. 아들 둘 키우는 일이 배우 생활에 엄청난 시너지를 준다. 나는 결혼했다고 해서, 또 누군가의 엄마라고 해서 불편하게 느껴지는 강한 역할을 거부하지 않았다. 멈추지 않았기에 지금 문정숙이란 인물을 연기하는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연기에서도 삶에서도 마음을 열어뒀으니까.”

배우 김희애. 사진제공|YG엔터테인먼트
● “두 아들, 지금도 ‘엄마가 TV에 왜 나와?’”
대중의 주목을 받는 배우이지만 김희애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다. 여러 후배 남자배우들이 ‘롤모델’로 삼을 만큼 일도 가정도 탄탄히 다진 생활인으로서의 저력도 있다. 1996년 벤처기업가 이찬진 씨와 결혼하고도 작품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키운 맏아들은 대학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있고, 둘째는 대학 진학을 앞뒀다. 두 아들은 TV에 김희애가 나올 때면 ‘우리 엄마가 왜 나오지’라며 신기해한다. 배우보다 엄마가 익숙한 탓이다.
“아들들이 내가 연기하는 걸 보지 않는다. 그게 오히려 편한데 가끔 서운한 마음에 ‘너희 너무 관심 없는 것 아니냐’ 묻기도 한다. 그래도 달라지지 않는다. 남편도 비슷하다. 남편 페이스북에 친구신청을 했더니 위축되니까 SNS에서 나가라고 하더라. 하하!”
김희애는 “배우는 가장 평범한 일상을 보여줄 수 있어야 가장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한다. 이런 가치관은 지금껏 그를 받친 원동력이다.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진짜 좋은 연기가 나오는 것 같다. 그러니 늘 건강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다짐한다. 조심하면서 살아왔다.”
그렇다고 쉬운 것도 아니었다. 올해로 데뷔 35년째인 김희애는 “어떤 인생이든 쉽지 않은 것처럼 나도 쉽지 않았다”고 돌이켰다. “공짜는 없다”고도 했다.
“어릴 땐 ‘인생은 이렇게 어두운 건가’ 싶었다. 그때 연예계 환경도 너무 열악했고 사회적으로도 연예인을 대하는 좋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난 언제 이 일을 관둘까…, 그런 생각이 지배했다. 그래도 견뎠다. 결혼하고서도 역할을 거부하지 않았다. 지금은 합리적이고 밝은 세상이 됐다. 그러니 사람은 오래 살아야 한다.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이 올 테니까.”
삶에서 배우로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은 김희애는 여전히 도전하고 싶은 게 많다고 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영화 ‘쓰리 빌보드’를 꺼냈다. 딸을 잃은 엄마의 이야기이니 당연히 그 엄마 역을 하고 싶다고 말할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김희애는 “비열하면서도 소심한 경찰관을 연기한 샘 록웰에 완전히 반했다”며 “그렇게 세련된 연기를 꼭 하고 싶다. 아주 큰 자극이 됐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