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수의 라스트 씬] 한물간 스타와 매니저…이보다 따뜻할 수 있을까

입력 2018-07-09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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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영월 주민들이 전하는 생생한 일상의 사연은 ‘한물간’ 스타 최곤(박중훈·오른쪽)에게 세상살이의 따스함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준다. 박민수(안성기)는 고달프지만 무던하게도 그의 곁을 지켜준다. 연출자 이준익 감독 등 제작진이 이들과 함께 그 따스한 시선을 담아냈다.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영화 ‘라디오 스타’

최곤의 꿈 지켜주기 위해 떠난 민수
그를 찾는 최곤의 목소리에 눈물만
우정 확인한 마지막 장면 여운 가득


‘이젠 당신이 그립지 않죠 / 보고 싶은 마음도 없죠 / 사랑한 것도 잊혀가네요 / 조용하게 / 알 수 없는 건 / 그런 내 맘이 / 비가 오면 눈물이 나요 / ….’

겨울 찬바람이 마음까지 얼어붙게 하던 2007년 1월 초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서울 충무로의 한 삼겹살집 2층 널찍한 방에서 통기타 반주에 낯익은 목소리의 노래가 실려 흘렀습니다. 방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한두 명씩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테이블 저 테이블을 돌며 소주잔을 나누다 어느새 기타를 들고 창가로 향한 사람은 배우 박중훈이었습니다. 이날 자리를 위해 낙원상가에서 급하게 샀다는 기타를 능숙한 솜씨로 튕기며 ‘비와 당신’을 불렀습니다.

‘이젠 괜찮은데 / 사랑 따윈 저버렸는데 / 바보 같은 나 / 눈물이 날까’ 하는 마지막 후렴구에 이르러 배우 안성기가 그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는 박중훈을 위해 우산을 펴 들었지요.

안성기와 박중훈은 그렇게 자신들이 주연한 영화 ‘라디오 스타’의 주제가인 ‘비와 당신’의 멜로디에 맞춰 그 마지막 장면을 재연하며 좌중을 웃음 짓게 했습니다. 삼겹살과 소주에 흥겹게 취해가던 사람들은 두 사람의 우정이 빚어낸 또 하나의 따스한 풍경에 흐뭇한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윽고 2차 자리로 향하며 큰 길로 나섰습니다. 충무로 도로 위로 불어온 찬바람은 어느새 사람들의 마음에서 훈풍이 되었습니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먹먹하지만 따스한 추억

‘라디오 스타’가 개봉한 것은 2006년 추석 연휴를 앞둔 9월 말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먹먹함이 남긴 여운을 한동안 잊지 못했습니다.

1988년 가수왕을 차지할 만큼 톱스타로 군림했던 최곤. 하지만 더 이상 누구도 그를 찾지 않습니다. 돈도, 명예도 이젠 그의 것이 아니지요. 그래도 20여년 세월을 그와 함께한 민수는 그 곁을 무던히 지키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신이 ‘톱스타’인 줄 아는, 아니 그렇게 여겨야 그나마 ‘쪽팔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으며 늘 투덜대는 최곤을 살뜰히 챙기는 것도 그의 몫이지요.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낸 것은 돈이었습니다. 최곤 모르게 다가와 자리를 비켜 달라는 젊은 자본 앞에서 민수는 결심합니다. 그리고는 최곤의 꿈을 지켜주기 위해 정작 지키지 못한 아내와 딸의 가난한 일상으로 돌아갑니다.

그제서야 최곤은 자신이 진정으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민수 역시 자신을 애타게 찾는 최곤의 목소리에 아내와 함께 팔러 나섰던 김밥을 꾸역꾸역 우겨 넣으며 목이 메고 맙니다. 울컥울컥, 먹먹함은 바로 여기서 눈물이 되어 흐릅니다. 민수의 목 메임이 무엇 때문인지를 누구나 알기 때문이지요. 자신의 어깨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아랑곳하지 않고 최곤을 위해 우산을 펴드는 마지막 장면의 민수 덕분에 관객은 아마도 자신들의 삶에서 중요한 또 다른 무엇인가를 확인했을 겁니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안성기·박중훈이 안긴 공감

아쉽게도 ‘라디오 스타’는 당시 ‘타짜’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가문의 부활 - 가문의 영광3’ 등과 경쟁하며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었습니다. 그 전해 말 ’왕의 남자‘를 선보여 1000만 흥행을 맛본 이준익 감독의 신작이었지만, 기세는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극장에서 간판을 내릴 날도 얼마 남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예상은 보기 좋게 어긋났습니다. ‘라디오 스타’는 뒷심을 발휘하며 그해 말까지 관객을 만났습니다. 물론 누적 관객 159만여명에 그쳤지만, 상영 기간으로만 따지면 여느 흥행작 못지않았습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아마도 극중 최곤과 민수의 모습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이 배우로서 지나온 길을 떠올렸을 겁니다. 1950 년대 말 아역으로 데뷔한 안성기는 ‘국민배우’로 불릴 만큼 모든 관객에게 친근한 사람입니다. 그의 삶 또한 ‘모범’ 그 자체로 대중이 지닌 이미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현실을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음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지요. 박중훈 역시 1980년대 말 청춘스타로 일찍이 스크린 속에 자리매김하며 한동안 톱스타로서 화려함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또 굴곡도 없지 않았지만 여전히 박중훈은 한국영화의 대표적인 배우로 꼽히고 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은 1988년 박광수 감독의 ‘칠수와 만수’로부터 1993년 강우석 감독의 ‘투캅스’, 1999년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로 인연을 이어가며 5∼6년마다 한 번씩 호흡을 맞췄습니다. ‘라디오 스타’가 바로 그 네 번째 결실이었지요. 그만큼 한국영화에서 이들처럼 잘 어울리는 ‘콤비’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이준익 감독. 사진제공|영화사아침


● 이준익 그리고 충무로 꼬치의 추억

두 배우의 ‘찰떡’ 같은 호흡만큼 ‘라디오 스타’를 마치 실제의 이야기처럼 받아 안게 한 이들은 또 있습니다. ‘라디오 스타’의 연출자 이준익 감독과 제작사 영화사 아침의 정승혜 대표 그리고 타이거픽쳐스의 조철현 대표입니다. 세 사람 역시 당시 20여년 가까운 세월을 한 사무실에서 나눴던 이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이들은 ‘왕의 남자’를 함께 만들었고, 이전 씨네월드라는 수입배급사에서 동고동락하며 얻은 상당한 액수의 빚을 청산하기도 했지요.

이 감독이 1980년대 ‘키드 캅’으로 ‘폭망’한 뒤 2003년 ‘황산벌’로 ‘재기’하기 전 아직 씨네월드의 ‘이 사장’으로 불리던 때였습니다. 이 감독, 정 대표와 충무로 골목길의 초라한 파라솔 밑에서 다 타들어간 값싼 꼬치를 뜯으며 서로의 고민을 나누기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때마다 정 대표는 그만의 낙천적 성격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그의 이메일 아이디는 ‘amsaja’였습니다. 암사자를 좋아한 그답게 열정적이었던 그였습니다. 영화 카피라이터로서 대중적 명성까지 지닌 그였지만, 그 낙천적 열정은 또 한 편 소박해서 그를 자칫 ‘누나’라고 부를 뻔하기도 했으니까요.

무엇이 영화라는 이름 아래 이들을 하나로 묶어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들이 세상에 내어 놓았던 영화를 통해 어림짐작할 뿐입니다. 영화는 고스란히 이들의 ‘성정’이라 할 만합니다. 그 핵심은 바로 ‘사람’입니다.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지요. ‘라디오 스타’는 물론 ‘왕의 남자’ ‘즐거운 인생’ ‘소원’ ‘님은 먼 곳에’ ‘사도’ ‘동주’ ‘박열’ 그리고 현재 상영 중인 ‘변산’까지.

2010년 정 대표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건강함으로 충무로를 지켰다면 이 감독과도 여전히 많은 영화를 함께했을 테지요. 그가 살아 있다면 써냈을 ‘변산’의 카피는 어떤 것일까요. 안성기와 박중훈에게도 영화는 그렇게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 출발했겠지요. 두 배우가 다시 함께 카메라 앞에 나선다면 그 무대는 또 어떤 것일까요.

‘라디오 스타’를 다시 들여다봅니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한 장면. 사진제공|시네마서비스


■ 영화 ‘라디오 스타’는?

이준익 감독의 2006년 작품. ‘왕년의 스타’ 최곤과 그의 오랜 매니저 박민수의 이야기. 허망한 인기도 날아간 지 이미 오래된 세월, 하지만 최곤과 박민수는 서로의 곁을 떠나지 못한 채 신산하지만 그래도 살 만한 세상살이를 엮어간다. 박민수 역의 안성기와 최곤 역의 박중훈은 마치 자신들이 배우로서 이력을 내보이는듯, 관객의 공감을 자아내며 그해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함께 품에 안았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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