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임춘애의 라면과 김서영의 햄버거

입력 2018-08-28 15: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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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수영대표팀 김서영. 동아일보DB

2018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수영대표팀 김서영. 동아일보DB

아시안게임 우승선수의 소감에서 음식이 튀어나왔다. 2018자카르타-팔렘방대회 수영 여자 개인혼영 200m에서 우승한 김서영이 주인공이다. 경기 후 방송 인터뷰에서 “지금 가장 먹고 싶은 음식”으로 햄버거를 말했다. 기록 달성을 위해 패스트푸드를 자제해왔을 24세의 선수는 대회를 마감하면서 자신을 칭찬하고 축하하는 음식으로 햄버거가 먼저 떠올랐던 모양이다.

선수들은 큰 경기를 앞두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절제해야 한다. 가장 힘든 것은 먹는 것을 컨트롤하는 일이다. 체급종목의 선수에게는 감량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숙명이 있다. 그 감량의 고통이 얼마나 힘든지는 프로복서 장정구가 기자에 들려준 적이 있다. “굶어가면서 훈련을 하면 배가 고파 밤에도 잠이 오지 않는다. 반경 몇 ㎞ 밖의 음식 냄새도 코로 들어온다. 그런 상황에서 가족이 내 얼굴을 보고 밥을 먹을 수 없다. 집밖에서 훈련하는 이유다”라고 했다.

다른 종목도 마찬가지다. 적정 수준의 몸무게를 위해 하루 종일 사과 한쪽으로 버티는 선수도 있다. 때로는 그것도 안 돼 굶는 선수도 많다. 이런 스트레스 때문에 경기가 끝나면 달고 기름진 음식을 찾는 선수들이 많다. 김서영도 그런 이유로 햄버거를 머릿속에 떠올렸을 수 있다.


● 1986년 아시안게임과 라면의 기억

그의 인터뷰를 보면서 연상되는 선수가 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의 임춘애다. 육상 여자 800m,1500m, 3000m에서 3개의 금메달을 따냈던 선수. 유난히 말라보였던 그가 힘들게 결승선을 통과한 뒤 “라면만 먹으면서 운동했다. 우유를 마시며 운동하던 친구들이 부러웠다”는 발언으로 모두의 눈물을 훔치게 만들었다.

모두가 가난했고 배고픔이 여전히 두려웠던, 그래서 ‘잘살아보세’를 함께 외쳤던 그 시절. 깡마른 여고생의 라면 발언은 언론사의 오보였지만, 대중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라면은 모두의 마음속에 동질감을 심어줬다.

무시무시한 전두환 정부는 88올림픽과 86아시안게임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다. 스포츠는 곧 국력이라고 강조하던 대통령은 대기업 총수에게 체육단체의 회장을 맡기고 메달을 책임 지웠다.

그 결과 86아시안게임 복싱 전체급 금메달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도 벌어졌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군인정신과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재벌 총수의 충성심이 만들어낸 결과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기적을 만들어낸 임춘애(왼쪽)의 기록은 아직 그대로다. 이제는 후배들의 몫. 그는 대한육상경기연맹 여성위원으로서 자신을 넘어 더욱 높이 도약할 후배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 기적을 만들어낸 임춘애(왼쪽)의 기록은 아직 그대로다. 이제는 후배들의 몫. 그는 대한육상경기연맹 여성위원으로서 자신을 넘어 더욱 높이 도약할 후배들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임춘애는 국가대표 후보에도 없던 선수였지만 대통령 장인의 추천으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올림픽을 앞두고 꿈나무를 발굴하는 사업이 한창인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굴러 들어온 돌은 선수촌에서 찬밥신세였다. 그래서 더욱 묵묵히 흘린 땀이 기적을 만들었다. 임춘애가 초등학교 훈련 때 주변에서 선물 받은 라면을 간식으로 자주 먹었다고 말한 것이 와전돼 오보가 됐다.

진실이 무엇이건 단군 이래 최초의 국제규모 스포츠대회를 개최했다는 자부심으로 86아시안게임을 치른 사람들은 라면소녀의 스토리를 더 믿는다.


● 2018년 아시안게임과 동계올림픽의 햄버거가 상징하는 것은?


1986년 임춘애의 라면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눈물과 한이 뒤섞인 생존용 음식이라고 기자는 해석한다. 반대로 2018년 김서영의 햄버거는 풍요의 시대를 살아온 젊은 세대의 달라진 입맛과 음식문화의 변화를 상징한다.

중장년들에게 자장면은 뭔가 축하할 날에 먹었던, 그래서 더욱 생각나는 음식이듯 요즘 세대들에게는 햄버거나 피자가 그런 역할을 대신한다.

사실 햄버거는 평창동계올림픽 때도 화제가 됐다. 이때는 상황과 의미가 달랐다. 주인공은 빙상의 김보름이었다. 여자 팀추월에서 ‘왕따’ 논란으로 대중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던 그는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했다. 사람의 눈이 두려워 선수단 식당에도 가지 못했던 그는 사흘 동안 굶은 몸을 햄버거 한 조각으로 달랜 뒤 주 종목 매스스타트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

레이스 뒤 눈물을 흘리며 관중에게 사죄하던 모습은 잊혀지지 않는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은 채 흥분한 사람들은 그를 욕했다. 그렇게 해서 만족했을지 모르겠지만 젊은 선수는 결코 잊지 못할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김보름은 그 때 햄버거를 먹으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정말 궁금하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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