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기회가 오면 이런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 ‘응답하라 1988’의 신원호 PD는 나라는 배우를 처음으로 크게 활용해 주신 분이었어요. 많은 단역들과 기능적인 역할을 해왔던 내 모습을 알아봐주셨죠. 물론 그 역할들 모두 필요하고 중요한 캐릭터였고요. ‘응답하라 1988’이후에 많은 역할을 맡게 된 것도 사실이죠. ‘비밀의 숲’은 그 중간 과정에서 또 다른 나를 찾아줬고 대중들에게 각인시켜준 작품이었어요. ‘명당’은 저를 완성시켜준 작품이라고 할까요? 이 영화로 인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응답하라 1988’부터 19일 개봉되는 ‘명당’까지 배우 유재명은 지난 3년간을 돌이켜보면 여전히 ‘어벙벙’하다고 말했다. 그는 “길에서 만난 분들이 ‘동룡이 아버지’라고 부르신다.(웃음) ‘비밀의 숲’의 이창준 검사 역 같은 인생캐릭터를 만났고 ‘명당’이라는 대작에도 출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스케줄을 가다가도 ‘멍’할 때가 많다. 짧은 시간에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긴 것 같다”라고 말했다.

유재명이 ‘명당’에서 맡은 역은 구용식이다. 그는 뛰어난 수완과 말재주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져 땅의 기운을 읽는 친구이자 지관인 박재상과 함께 풍수를 보는 일로 돈을 번다. 구용식 캐릭터는 극 중에서 유일하게 재미를 주며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역할이다. 이 역을 맡은 유재명은 “간만에 내 옷을 찾아 입은 것 같다”라고 말했다.

“연극 연기를 할 때도 코미디를 많이 했었어요. 연출을 할 때는 실험적이고 철학적인 작품을 많이 해서 그런지 연기는 코미디가 그렇게 끌렸어요. 간만에 저도 재미있는 역할을 맡아서 제 옷을 입은 듯 편안했습니다. 평소에도 목이 늘어나고 고무줄 늘어난 옷을 입긴 하거든요. 구용식은 그런 옷과 같은 인물이었어요.”


캐스팅 당시 유재명은 큰 부담을 느꼈다고 말했다. 영화 ‘하루’ 이후 이렇게 큰 역은 처음이었던 것. 백윤식을 포함해 조승우, 지성과 같은 톱배우들과 이름을 나란히 거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그는 “영화 시나리오를 재미있게 읽었고 내가 추석 시즌에 걸리는 큰 영화에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믿기지 않았다”라며 “박희곤 감독과의 만남으로 내가 할 수 있겠다는 신뢰가 생겼다”라고 말했다.

“감독님께서 ‘구용식은 단순한 조력자가 아니다. 김좌근이나 흥선군이 왕위를 노리는 신념과 다를 게 없다’라고 하시더라고요. 구용식은 그런 큰 야망을 갖고 있진 않지만 자기가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돈이나 많이 벌며 사는 걸 우선순위로 여기는 사람이라며 그것도 극 중에서 욕망의 한 방향으로 제시될 수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구용식 역에 자신감이 좀 붙었어요.”

유재명은 “‘명당’은 자신의 터닝포인트”라고 하며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명당’ 전까지만 해도 카메라 연기를 할 때 제 것을 다 쏟아내느라 힘들었다면 이번에는 정말 즐길 수 있었던 현장이었다. 감독님이 분명한 디렉션을 주시면서도 유머러스하시고 제작진 모두 즐거워 하며 촬영을 했다”라며 “영화라는 작업이 이렇게 즐거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20년 가까이 연기생활을 했지만 카메라 앞에 본격적으로 선 것은 3~4년 정도밖에 안 되기 때문에 여전히 카메라 울렁증이 있어요. 끝나면 다시 하고 싶고 집에 가면 제가 했던 장면이 떠오르고. 배우들은 아마 다 그럴 거예요. 그런데 ‘명당’은 모든 분들이 절 믿고 있다는 생각 덕분인지 정말 재밌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소중한 작업이었고 큰 스크린에 멋진 배우들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영광스럽습니다.”


유재명에게 있어서 ‘비밀의 숲’을 빼놓을 수 없다. 이창준 검사 역으로 조승우와 대립각을 세운 연기를 펼친 그는 카리스마 있는 연기와 극의 반전을 안겨주면서 큰 찬사를 받았다. 완벽한 수트 차림에 섹시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 이 이야기를 들은 유재명은 “젊었을 때 나도 섹시한 적이 있었다”라며 “나라고 지금처럼 푸짐한 인상은 아니었다”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키가 크고 다리도 길고 해서 젊었을 때는 그런 이야기를 종종 듣곤 했어요.(웃음) 그런데 지금은 자연스런 나잇살과 제 성격 탓에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비밀의 숲’의 이창준 검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캐릭터였잖아요. 회색의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죠. 중년 남자들이 느끼는 매력이 거기에 있었던 것 같아요. 제겐 두말 할 것 없는 ‘인생캐릭터’입니다.”

유재명은 이 작품으로 대중들에게 이름을 알렸고 조금씩 관심을 받기 시작했고 그런 그를 제작진에서 찾는 것도 당연지사였다. 이런 날이 찾아오면서 그는 “나이는 적당히 들었는데 신인 연기자가 된 것 같다”라고 하면서도 “관심에 대한 책임감이 느껴진다”라며 말을 이어나갔다.

“연기는 여전히 끝이 없는 고민의 연속인 것 같아요. 평생 하고 싶은 연기이기 때문에 대중들의 관심을 받더라도 중심을 잘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살고 있어요. 요즘 제 스스로에게도 묻고 있는 질문이기도 하고요. 요즘에는 대중들이 원하는 연기와 제가 원하는 연기의 연결지점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요. 제 어떤 부분을 좋아하시는 건지 반추해보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좋은 작품을 하는 좋은 연기자로 남고 싶습니다. ‘비밀의 숲’에서도 그랬고 ‘명당’이 그런 작품 중 하나죠.”


연기자로서 황금기를 맞고 있는 유재명은 한 때 자신의 고향인 부산에 도로 내려갈까도 생각을 했었다. 그는 “서울에서 연기를 하면서 적응을 잘 못하고 있을 때 내려가려고 했다. 내가 갖고 있는 것이 많지 않았음을 느꼈다”라며 “당시 옥탑방에 살았는데 같은 동네에 살던 후배들과 술 한잔 걸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때 ‘응답하라 1988’을 만났다”라고 말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아주 저렴한 옥탑방에 살았는데 거기서 좋은 일이 많이 생겼어요. 지금 이사를 했지만 산책하러 가면 꼭 거기를 지나갑니다. ‘명당’에서 나온 것처럼 거기 터가 좋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생각하기엔 그 곳에 있을 때 했던 짧은 마음고생과 불타올랐던 제 열정이 이런 기회를 오게끔 한 것 같아요.”

이에 지금도 무대 위에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너희들이 연기를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역이 안 맞을 뿐”이라며 “자존감이 낮아질 필요가 없을 것 같다고 말해주고 싶다. 나처럼 분명 힘든 시간을 거치겠지만 그럴수록 마음을 단단히 먹었으면 좋겠다. 좋은 작품도 많고 좋은 사람들도 많다. 언젠간 자신에게 맞는 옷을 발견한 것처럼 작품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명당’ 이후 유재명의 차기작은 ‘마약왕’과 ‘나를 찾아줘’이다. 그는 “좋은 작품들이 들어오니까 놓치기에 너무 아까워서 많은 것을 하게 된 것 같다”라며 “‘명당’처럼 계속 마음에 남는 작품들을 계속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요즘은 감사하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어요. ‘감사하다’라는 말이 참 좋은 말인데 너무 많이 하면 또 그 의미가 덜해지는 기분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은 만큼 더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 ‘정확한’ 연기를 하고 싶어요. 그게 연기자로서 바른 길을 가는 것 같아요.”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