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강호. 사진제공|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20대 땐 나도 내 길 아닌가 좌절도
시간이 약! 이상우 선생님 큰 도움
기존 연기 틀 깨트린 ‘넘버3’ 희열
블랙리스트? 누가 그걸 알려주나
‘밀정’ 때 촬영 제약…이유 있었네
좋아하는 연기…그만큼 책임감도
누가 이견을 가질 수 있을까. 한국영화 100년을 드러내는 하나의 상징, 지난 2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한 한국영화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주역, 동시대를 살아가는 관객과 소통하고 감동과 위로를 건네는 배우. 바로 송강호(52)이다.
스포츠동아가 창간 11주년 및 2019년 한국영화 100년을 맞아 100명의 영화 전문가와 함께 꼽은 ‘최고의 남자배우’로서 송강호는 압도적인 선택(49명)을 받았다. 전문가들은 “아티스트로서 배우” “인물 해석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천재성” 등 평가를 내놨다. 영화 ‘사도’를 함께한 이준익 감독은 “한국인의 대표 정서와 감성을 표현하는 배우”라고도 했다.
12일 오후 서울 논현동에서 만난 송강호는 “영광스러우면서도 송구스럽다”고 했다. 그런 뒤 14살 때 처음 배우가 되고자 마음먹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시간을 막힘없이 그러면서도 신중하게 풀어냈다.
-최근 ‘나랏말싸미’ 촬영을 끝내고 모처럼 한가할 때 만나니 더 반갑다.
“나도 조금 설레었다. 하하! 한국영화 100년을 다루는 이런 기획은 배우 입장에선 의미가 남다르다. 영광이면서도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다.”
-출발부터 짚어보자. 언제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나.
“14살, 중학교 2학년 때다. 친구들이 내 이야기 묘사나 표현력을 재미있어 했다. ‘어? 나한테 이런 재능이?’ 했다. 재능을 발전시켜 배우가 되겠다는 꿈이 생겼다.”
-그 즈음 영향 받은 배우나 영화가 있나.
“워낙 시골(경남 김해)이어서 극장도, 대중문화를 접할 기회도 없었다. 막연한 꿈이었다. 그 막연함이 대학 진학 전까지 이어졌다.”
-입시 때 좋아하는 배우를 묻는 면접관에게 ‘홍금보’라고 답한 일화도 있다.
“배우를 잘 몰랐다. 마침 며칠 전 본 홍금보 영화가 생각나서.(웃음) 부산 경성대 연극영화과 시험을 쳤는데 두 번 떨어졌다. 삼수를 하려니 아, 이게 뭐라고. 그래서 경상대에 들어갔다. 신봉선 씨가 과 후배다.”
-부산 극단이 연기의 출발점인데.
“대학 1학년 때 연극을 하면서 사물놀이와 마당극을 접했다. 부산 극단에서 수련 받고 교류도 했다. 군 제대하고 학교를 관뒀다. 1년 반 정도 부산에서 연극을 했다. 새로운 상황이나 표현을 연극에 담아내는 게 신선했다.”
-연극으로 세상에 눈을 뜬 건가.
“부산에서 활동하다가 서울 대학로 연우무대를 알게 됐다. 내가 생각한 이상향이 거기 있었다. 연우를 흠모해 상경한 게 1991년이다. 꼭 창작극이 아니더라도 관객에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분명히 전달하고 싶었다. 그걸 가장 예술적이면서도 기술적으로 표현하는 곳이 연우무대였다.”
-그때의 가치관이 지금의 당신을 있게 한 자양분일까.
“물론이다. 상식과 정의에 대해 어떤 형태로든 갈구해왔다. 그러다보니 평범하지 않은 작품이 필모그래피에 쌓이기도 했다.”
-20대 때는 어땠나. 방황하는 시기 아닌가.
“너무 힘들었지. 젊으니까 어떤 고달픔도 이겨내고 돌파했지만 두어 번 정도 ‘내 길이 아닌가’ 좌절했다. 어떤 배우든 비슷할 거다. 경제적인 부분도 그렇고.”
-그 뒤론 없었나.
“처음엔 좋아서 시작했지만 좋지만은 않구나, 참 힘들구나. 일반인은 모르는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구나 했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준다면.
“외형적으로는 참여한 영화가 아쉬운 성적에 머물렀을 때. 나 뿐 아니라 주변의 노고가 한 번에 무너지는 것 같다. 나름대로 좋은 영화, 좋은 연기를 보여주려 애쓰는데, 그걸 다른 잣대로 평가하려고 할 때면 많이 아쉽다.”
-어떻게 극복하나.
“아…. 시간이 약이 된다. 지나면 새로운 용기도 생기고. 세상사 그렇지만 동료들이 있으니 힘이 됐다. 스승인 이상우 선생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연우무대와 극단 차이무 동료들도 있었다. 아시다시피 배우 김윤석과도 한때를 같이 보냈다.”
송강호는 19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로 영화를 시작했다. 이듬해 ‘넘버3’ ‘초록물고기’를 통해 일찍이 충무로에 없던 ‘신기한’ 배우의 등장을 알렸다. 2000년 영화 ‘반칙왕’으로 처음 주연을 맡은 뒤 2003년 ‘살인의 추억’부터 2013년 ‘설국열차’까지 한국영화의 확장을 이끌었다. 티켓파워에선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다. ‘괴물’ ‘변호인’ ‘택시운전사’까지 3편의 1000만 흥행작을 보유했다.
-설문에 참여한 전문가들 가운데 ‘동시대 배우’라는 사실에 주목한 답변이 많았다.
“어떤 스타일이나 형식에 얽매이기보다 이야기나 인물이 관객에 적확하게 다가가도록 하는 게 좋은 연기라고 생각해왔다. 뭐랄까. 1950년대부터 한국영화를 보면 시대 흐름에 맞춘 스타일이 존재해왔다. 그런 것들이 내가 주로 활동한 2000년대 들어 허물어졌다. 그런 면에서 관객이 감탄해준 부분도 있지 않을까.”
-‘한국영화 질적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도 있다. 스스로도 그렇다고 생각하나.
(순간, 송강호는 물론 인터뷰 자리의 모든 사람이 한 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넘버3’로 이야기한다면, 당시 크게 회자됐다. 아마도 지금껏 영화로 봐 온 연기의 틀을 한 순간 깨트린 희열 때문이었을 거다. 나를 통해 관객이 ‘영화에서도 저렇게 연기할 수 있구나’ 느끼지 않았을까. 물론 절대 연기가 뛰어나서는 아니다.”
-배우로서 사회적인 상황과 엮일 때도 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포함됐다는 걸 들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음…. 누가 그걸 직접 알려주진 않으니까 잘 몰랐다. 조심스럽고, 여전히 말을 아끼고 싶다. 내가 먼저 블랙리스트를 언급한 적은 없는데 그건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 제작자나 투자사가 직격탄을 맞는다. 영화 ‘밀정’ 땐 다른 작품에 허용된 촬영 공간을 우리는 쓸 수 없었다. 왜 그런지 파고들다보니, 이유(블랙리스트)가 있었다.”
송강호는 오직 영화로만 세상과 소통한다. 아들이 프로축구 수원 삼성의 송준평이란 사실 정도가 개인적으로 알려진 전부.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좀처럼 꺼내지 않는 그에게 아내에 대해 넌지시 물었다. “(아내와)가끔 시나리오를 같이 본다. 판단하는 데 좋은 척도가 된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것도 아닌, 가장 일반적인 관객의 눈이니까.”
-자신의 출연작을 빼고, 최고 한국영화를 한 편 꼽는다면.
“‘올드보이’다. 한국영화의 클래스를 한 단계 끌어올린 내용과 형식, 심미성이 놀랍다. 한국영화에 신세계가 열린 것 같았다.”
-왜, 배우를 하나.
“우선, 좋아서 한다. 하다보니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견디니까 작은 보람을 느끼고, 크지 않지만 내 삶의 가치도 생기게 됐다.”
-그렇다면, 연기는 뭘까.
“이야. 이건 또 어떻게 말해야 하나. 오래 전 문성근 선배가 어떤 인터뷰에서 비슷한 질문을 받고 답한 게 기억난다. ‘배우는 우리가 잊어버린 얼굴을 찾아주는 직업’이라는 말. 거기에 사족을 달자면, 누구나 갖고 있지만 자신도 모르게 감춰진 우리의 얼굴을 발견하게 해주는 게 연기이고 배우의 역할 아닐까. 잊어버린 얼굴을 찾으려 관객이 극장에 오고, 그렇게 같이 눈물을 흘리고 웃고 때론 감동도 받는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세상의 인정도 받은 지금, 행복한가.
“행복하지만 그만큼 무겁다. 오늘 이 자리도, 다른 때와 달리 무거운 책임이 느껴진다. 떨칠 수 없는 무거움이 따른다.”
● 송강호 프로필 및 주요 출연작
▲ 1967년 1월17일생 ▲ 1991년 연극 ‘동승’(연우무대) 데뷔 ▲ 1997년 ‘넘버3’ ▲ 2000년∼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 ‘복수는 나의 것’ ‘살인의 추억’ 등 ▲ 2006년 ‘괴물’로 첫 1000만 관객 ▲ 2007년∼ ‘우아한 세계’ ‘밀양’ ‘박쥐’ ‘관상’ ‘변호인’ ‘택시운전사’ ‘마약왕’ 등 ▲ 2019년 ‘기생충’ 개봉 준비
● 주요 수상 경력
▲ 1997년 대종상 신인상·청룡상 남우조연상(넘버3) ▲ 2000년 대종상 남우주연상(공동경비구역 JSA) ▲ 2003년 대종상 남우주연상(살인의 추억) ▲ 2006년 아시안필름어워드 남우주연상(괴물) ▲ 2010년 올해의 영화상 남우주연상(박쥐) ▲ 2014년 올해의 영화상 남우주연상(변호인) ▲ 2017년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남우주연상(택시운전사) 외 다수
[이렇게 조사했습니다]
1. 한국영화 100년, 최고의 작품은?(2편씩 선정)
2. 한국영화 100년, 최고의 감독은?(이하 1인씩 선정)
3. 한국영화 100년, 최고의 남자배우는?
4. 한국영화 100년, 최고의 여배우는?
설문 기간 : 2018년 12월20일~2019년 2월8일
참여자 및 인원 : 감독·제작자(프로듀서 포함)·홍보마케터·평론가 등 영화 전문가 100명
(아래 명단 참조)
대상 작품 : 1919년 10월27일부터 2018년 12월20일까지 개봉 한국영화
설문 응답자(총 100명·가나다 순)
▲강성률(평론가) ▲강우석(감독) ▲강유정(평론가) ▲강제규(감독) ▲강지연(영화사 시선 대표) ▲강한섭(평론가·서울예대 교수) ▲곽경택(감독) ▲곽신애(바른손이앤에이 대표) ▲권병균(아트서비스 대표) ▲권영락(시네락픽쳐스 대표) ▲길영민(JK필름 대표) ▲김광현(영화사 하늘 대표) ▲김권식(CJ엔터테인먼트 기획개발팀장) ▲김동현(메리크리스마스 이사) ▲김두호(평론가) ▲김상오(오죤필름 대표) ▲김선엽(평론가) ▲김성수(감독) ▲김성우(다이스필름 대표) ▲김성환(어바웃필름 대표) ▲김영진(평론가·명지대 교수) ▲김용화(감독) ▲김원국(하이브미디어코프 대표) ▲김의석(감독) ▲김정민(필름케이 대표) ▲김재중(무비락 대표) ▲김조광수(감독) ▲김종원(영화사학자·평론가) ▲김지연(싸이런픽쳐스 대표) ▲김태영(감독) ▲김현우(페퍼민트앤컴퍼니 대표) ▲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김호선(감독) ▲나경찬(인벤트스톤 대표) ▲남동철(부산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민병록(평론가·동국대 명예교수) ▲박민희(프로듀서) ▲박준경(NEW BREND 사업부문 대표) ▲박철수(필름몬스터 대표) ▲배장수(평론가·한국영화제작가협회 상임이사) ▲서우식(콘텐츠W 대표) ▲손세훈(진필름 대표) ▲신범수(영화사 수박 대표) ▲신철(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집행위원장) ▲신유경(영화인 대표) ▲심재명(명필름 대표) ▲안동규(두타연 대표) ▲안수현(케이퍼필름 대표) ▲안은미(폴룩스(주)바른손 대표) ▲엄용훈(삼거리픽쳐스 대표) ▲여한구(캐피탈원 대표) ▲오동진(평론가) ▲오성윤(감독) ▲오승현(영화사 두둥 대표) ▲오정완(영화사 봄 대표) ▲원동연(리얼라이즈픽쳐스 대표) ▲유인택(동양예술극장 대표) ▲윤성은(평론가) ▲이관수(프로듀서)
▲이동하(레드피터 대표) ▲이민호(더드림앤드픽쳐스 대표) ▲이상무(롯데엔터테인먼트 상무이사) ▲이상윤(쇼박스 투자제작본부장) ▲이안나(안나푸르나필름 대표) ▲이용관(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 ▲이유진(영화사 집 대표) ▲이은(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이장호(감독) ▲이정범(감독) ▲이정세(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영화사업본부장) ▲이준익(감독) ▲이창세(극동대 교수) ▲이춘연(씨네2000 대표) ▲임승용(용필름 대표) ▲장길수(감독) ▲장보경(딜라이트 대표) ▲장원석(BA엔터테인먼트 대표) ▲장윤현(감독) ▲장진승(오스카10스튜디오 대표) ▲전찬일(평론가) ▲전혜정(런던아시아영화제 집행위원장) ▲정수완(평론가·동국대 교수) ▲정재형(평론가·동국대 교수) ▲정종훈(크리픽쳐스 대표) ▲정중헌(평론가) ▲조선묵(활동사진 대표) ▲조혜정(평론가·중앙대 교수) ▲주필호(주피터필름 대표) ▲차승재(동국대 교수) ▲채수진(프로듀서) ▲채윤희(올댓시네마 대표) ▲최낙권(초이스컷픽쳐스 대표) ▲최선중(로드픽쳐스 대표) ▲최용기(커리지필름 대표) ▲최용배(청어람 대표) ▲최정화(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문샷필름 대표) ▲최재원(워너브러더스코리아 대표) ▲한재덕(사나이픽쳐스 대표) ▲허남웅(평론가) ▲황필선(영화사 아람 대표)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