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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사커] ‘한 때 명문’ 수원 삼성의 감독으로 산다는 것

입력 2020-07-22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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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이임생 전 감독은 외로운 싸움 끝에 결국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 전 감독이 견뎌야 했던 것은 비단 성적에 대한 압박만이 아니었다. 적절한 지원책도 없이 감독만을 무책임하게 벌판에 내놓은 구단의 무관심이 그에게 고독감을 심어줬다.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수원 이임생 전 감독은 외로운 싸움 끝에 결국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이 전 감독이 견뎌야 했던 것은 비단 성적에 대한 압박만이 아니었다. 적절한 지원책도 없이 감독만을 무책임하게 벌판에 내놓은 구단의 무관심이 그에게 고독감을 심어줬다. 사진제공|한국프로축구연맹

1990년대 중반 삼성그룹이 프로축구단을 창단한다고 했을 때 시선은 엇갈렸다. 프로리그의 외형 확대와 흥행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걷잡을 수 없는 ‘돈 싸움’을 우려하기도 했다. 수원 삼성은 1995년 2월 창단을 선언한 뒤 1996시즌부터 K리그에 참여했다.

우려와 달리 수원의 탄생은 흥행의 기폭제였다. 올림픽대표 출신들을 대거 영입했고, 수준급 외국인 선수들도 데려와 창단 첫 해부터 돌풍을 일으켰다. 특히 1994년 월드컵대표팀을 이끌었던 김호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는 어느 팀에도 꿀릴 게 없었다. 김 감독과 함께 조광래 코치, 최강희 트레이너가 벤치를 지켰다.

수원이 짧은 시간에 명문 구단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선수단과 프런트, 그리고 팬이 하나로 뭉쳤기 때문이다. 선수단은 오롯이 경기에만 집중했고, 구단은 부족한 걸 채워주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여기에다 열정적인 응원이 더해지면서 수원은 빠르게 자리를 잡았다.

노련한 김호 감독은 명문구단의 초석을 놓았다. 독일에서 축구 공부를 한 윤성규 초대 단장과 궁합이 잘 맞았다. 이들의 환상적인 조화 속에 창단 3년 만에 정규리그 정상에 올랐고, 1999년엔 국내 모든 대회를 휩쓸었다. 수원의 위상을 이어간 사령탑은 차범근 감독이다. 한국축구 최고 스타였던 그는 2차례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등 감독으로서도 성공시대를 열었다.

감독들이 정상에서 호령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능력과 함께 구단의 물심양면 지원 덕분이었다. 감독의 자존심을 세워주기 위해 연봉 등은 항상 K리그 최고 수준이었고, 계약된 임기도 최대한 보장해줬다. 이건 감독에 대한 기본 예의였다. 김 감독이 8년, 차 감독이 7년을 맡았다.

운영주체가 제일기획으로 넘어가면서 감독과 구단의 아름다운 전통도 희미해졌다고 한다. 지원도 지원이지만 서로의 관계가 예전만 못하다는 게 공통된 지적이다. 레전드 출신의 서정원 감독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했다. 서 감독은 부족한 지원에도 명문구단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임기를 채우긴 했지만 2018시즌 도중엔 자진사퇴를 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5대 사령탑인 이임생 감독이 최근 물러났다. 일각에선 자진사퇴를 빙자한 경질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이유야 어찌됐든 이 감독은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지휘봉을 내려놓았다.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FA컵 우승으로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을 따낸 성과는 온데 간 데 없다.



안타까운 건 감독 혼자 허허벌판에 내버려졌다는 점이다. 승패에 따른 심적 압박감을 견뎌내야 하는 외로움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건 고립감이다. 그 고통을 혼자 짊어졌다.

감독은 선수단을 대표하는 리더다. 성적에 대한 책임과 함께 그만한 권한도 갖는다. 하지만 권한을 갖기엔 지원이 인색했다. 소통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예의도 없었다. 힘겨워하는 감독을 두고 구단이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감독과 구단이 한 몸처럼 움직였던 예전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수원 특유의 그 끈끈함이 그립다.

최현길 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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