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단 100주년 맞아 ‘야구 명문고’ 부활 노리는 선린인터넷고 야구부

입력 2020-08-13 14: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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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제20회 황금사자기 우승 당시 모습

선교사 필립 질레트가 1904년 황성기독청년회(현 한국기독교청년회·YMCA)를 통해 처음 소개한 이후 한국 야구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우승,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 등을 일구며 100년 남짓한 역사 속에 세계 야구의 중심으로 우뚝 성장했다. 1982년 출범한 한국프로야구는 미국 메이저리그(1876년)나 일본 프로야구(1936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짧은 역사 속에서도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세계가 주목하는 리그로 자리매김했다. 한국 야구가 이처럼 길지 않은 역사 속에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밑거름 역할을 한 고교야구의 힘이 컸다.

1969년 제23회 황금사자기 우승 당시 모습

한국 야구 성장의 근간 역할을 한 전통의 명문고 중의 하나인 선린인터넷고(구 선린상고)가 올해 창단 100주년을 맞았다. 1899년 관립 상공학교로 첫 발을 뗀 선린인터넷고는 1904년 농상공학교에 이어 1951년 선린상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2000년 1월 정보통신부 소프트웨어 특성화연구사업 지원학교로 선정된 뒤 그해 11월 학교명을 선린인터넷고로 바꿔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20년 선린인터넷고 야구부가 역사적인 첫 발을 내디딜 때만 해도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 시대상 탓에 야구부는 전원 일본인으로 구성됐다. 일본인에 의해 시작됐지만 한국인의 입단을 처음 허용한 1927년부터 본격적으로 팀 모습을 갖춰나가게 됐다. 1933년 7월 갑자원(甲子園·고시엔) 대회 예선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국내 정상에 섰다. 그때 주축 멤버가 공창준, 이연성이었다.

1969년 제23회 황금사자기 우승 당시 모습

경기고(1905년), 휘문고(1906년), 중앙고(1910년)에 비해 출발이 늦었던 선린인터넷고 야구부가 한국 고교야구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선린상고라는 이름을 쓴 뒤부터다. 1950년 한국전쟁 탓에 잠시 해체됐던 선린상고 야구부는 1953년 청룡기와 전국체전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63년 동아일보사 주최의 제17회 황금사자기 우승으로 마침내 명실상부한 국내 고교야구 최정상에 올랐다. 당시 우승 주역은 훗날 실업야구를 주름잡은 뒤 프로야구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을 지낸 한동화와 SK 와이번스 2군 사령탑을 지낸 김충(2008년 작고)이었다.

선린인터넷고의 최전성기는 황금사자기, 대통령배, 청룡기, 화랑대기 등 전국대회 4관왕을 휩쓴 1969년이었다. 제23회 황금사자기 결승에서는 경북고를 12-5로 여유있게 따돌렸다. KIA 타이거즈 감독을 지내고 현재 한국야구위원회(KBO) 규칙위원장을 맡고 있는 유남호가 그해 마운드를 지켰고, 나중에 모교 감독을 맡아 권오준, 손시헌, 이종욱 등 ‘1980년생 선린 트리오’를 키워낸 정장헌이 주전 포수였다.

외야에는 MBC 청룡~삼성 라이온즈를 거쳐 1987년 청보 핀토스 유니폼을 입고 도루왕에 올랐던 ‘쌕쌕이’ 이해창이 버티고 있었다. 시각에 따라 다소 엇갈리지만, ‘1969년 선린상고’는 ‘1971년 경북고’와 함께 한국 고교야구 양대 최강팀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막강했다.

1980년 선린상고 전성기를 이끈 박노준(왼쪽)과 김건우

선린인터넷고 야구부 제2의 전성기는 박노준과 김건우, 두 걸출한 스타가 맹위를 떨친 1980년이었다. 요즘말로 하면 ‘야구계 아이돌’이었던 둘은 ‘오빠부대’를 몰고 다니며 한국 고교야구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특히 박노준의 실력과 인기가 대단했다. 1학년이던 1979년 부산상고와의 대통령배 결승전에서 톱타자와 구원투수로 나서 팀 우승을 이끌고 최우수선수상을 거머쥐더니 이듬해에는 황금사자기와 청룡기 동시 석권을 견인했다.

1980년 10월 5일 동대문구장에서 열린 광주일고와의 제34회 황금사자기 결승전에서는 불펜으로 4.2이닝 동안 마운드를 지키고, 타자로 상대 투수 ‘국보’ 선동열에게 3-3 동점이던 8회 결승 2점 홈런을 뽑아내기도 했다. 당시 박노준과 선동열, 둘의 싸움은 ‘세기의 대결’로 불릴 만큼 큰 관심을 모았다. 박노준은 은퇴 후 히어로즈 단장과 우석대 교수를 거쳐 현재 안양대학교 총장으로 있다. 1986년 프로야구 신인왕을 차지했던 김건우는 해설위원과 KBO 육성위원 등으로 활약하다 현재 선린기념사업회 실무위원을 맡아 모교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

1980년 제34회 황금사자기 우승 장면

한 때 고교야구 무대를 주름잡던 선린인터넷고는 제2의 전성기 이후 오랜 기간 침체기를 겪었다. 1981년 박노준이 경북고와의 봉황기 결승전에서 1회말 홈으로 슬라이딩하다 왼쪽 발목이 꺾이는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 간 순간은 어쩌면 선린인터넷고의 긴 암흑기를 암시한 장면이었을지도 모른다. 다시 정상에 서기까지 무려 35년이 걸렸다. 오랜 기간 어려움을 겪다 2015년 제69회 황금사자기에서 대구상원고를 결승에서 7-2로 제치고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포효했다. 그 해 황금사자기 우승 주역이 바로 현재 국가대표급 투수로 성장한 두산 베어스 우완 이영하다.

창단 100주년을 맞은 선린인터넷고는 이제 새로운 도약을 노리고 있다. 든든한 동문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새로운 100년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1989년 졸업생으로 2017년 7월 모교 지도자로 부임해 현재 야구부를 지휘하고 있는 박덕희 감독은 “김정열 동문이 야구부 후원회장을 맡은 이후 동문들의 관심과 응원이 과거보다 훨씬 더 뜨거워졌다”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과거 선린상고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도록 앞으로 더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2015년 제69회 황금사자기 우승 장면

김도헌 기자 dohon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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