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깨는 소리] 법정스님과 몽블랑 만년필

입력 2020-12-30 19: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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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1932~2010)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기 전인 젊은 시절부터 불교계에서는 이미 ‘글 쓰는 스님’으로 유명하셨다고 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격려가 되고 때로는 날카로운 훈계가 되는 책들을 많이 남기셨지요. 불교신자가 아니더라도 법정 스님이 쓰신 ‘무소유(2004)’는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을 것 같습니다.

법정스님은 글을 쓸 때 만년필을 애용하셨습니다. 노트북을 열고 타닥타닥 키보드를 두드리는 법정스님의 모습은 아무래도 상상이 잘 되지 않습니다.

법정스님이 만년필로 글을 쓰셨다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는 편이지만, 어떤 만년필을 사용하셨는지 까지는 모르는 분이 대부분이실 겁니다. 법정스님이 애용하신 만년필은 몽블랑 제품이었다고 하지요. 모델명은 ‘146’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몽블랑 만년필’하면 딱 떠오르는, 전형적인 시가형의 검정색 만년필입니다.

숫자 크기에 따라 만년필의 사이즈가 점점 커지는데, ‘149’ 모델이 가장 유명합니다. 세계의 유명 정치가, 기업인들이 조약이나 계약을 맺을 때 사인용으로 자주 사용하는 모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만년필이 한 덩치 하는 만큼 무게가 묵직하고 글씨도 굵게 나와 일상 필기용보다는 사인용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지요.

법정스님은 149 모델보다 아담해 실사용으로 많이 쓰이는 ‘146’ 모델을 애용하셨는데, 촉은 얇은 ef 촉을 사용하셨습니다. ef 촉은 ‘엑스트라 파인’이라고 해서 가느다란 글씨를 쓸 수 있는 촉입니다.


어느 글에서 보니 ‘아주 가늘고 뾰족한 펜으로 사각사각 글을 쓰셨다’라고 되어 있던데, 몽블랑 만년필로 글을 써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ef 촉이라고는 해도 아주 가늘고 뾰족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알파벳을 주로 쓰는 유럽 만년필 모델들의 특성이기도 한데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꽤 두껍게 잉크가 나오지요.

같은 ef 촉이라고 해도 한자권(획이 많습니다)인 아시아, 대표적으로 파이로트, 세일러, 플래티넘과 같은 일본 만년필 제품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글씨가 유럽모델보다 가느다랗습니다.

게다가 몽블랑은 ‘사각사각’이 아니라 ‘기름 위를 미끄러지듯’ 써지는 만년필입니다. 요즘엔 볼펜 중에서도 미끄러지듯 써지는 제품이 많으니 어떤 필감인지 느낌이 오실 겁니다.

“필요에 따라 살되 욕망에 따라 살지는 말아야 한다. 하나가 필요할 때는 하나만 가져야지 둘을 갖게 되면 당초의 그 하나마저도 잃게 된다.”

법정스님의 저서 ‘산에는 꽃이 피네’에 나오는 글입니다. 이 글 속에는 법정스님을 대표하는 ‘무소유’의 진수가 들어 있습니다.

‘명필은 붓을 가리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는 많은 명인들이 장비광이었습니다. 옛날 선비들도 다른 것은 몰라도 붓과 먹, 벼루에 대한 욕심만큼은 부렸던 것 같습니다.

“만년필이 없으니 글 쓸 기분이 안 나네.”

법정스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무소유를 실천하며 평생을 사신 법정스님도 만년필만큼은 부재를 아쉬워 하셨던 겁니다.

앞서 밝혔듯 법정스님은 몽블랑 146 모델 만년필을 사용하셨습니다. 몽블랑은 만년필 중에서도 프리미엄 만년필이지요. 그만큼 가격이 비쌉니다. 법정스님이 사용하셨다는 몽블랑 146 모델은 지금도 80만~100만 원 정도 합니다. 그래서 “무소유라더니 그런 비싼 만년필을 사용해도 되는 거냐”고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소유는 ‘아무 것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을 적게 가져라’라는 것입니다. 굳이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이면 하나로 만족하는 삶이 무소유입니다. 법정스님은 만년필을 좋아하셨지만, 단 한 개의 만년필로 족하셨습니다.

누군가 선물로 드린 몽블랑 만년필을 써보고는 군더더기 없는 생김새와 부드러운 필감에 반해 버리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외에 나갔다가 똑같은 만년필을 보시고는 하나를 더 구입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토록 마음에 들어 애지중지했던, 원래 쓰던 만년필에 대한 소중함이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아채신 겁니다.

그래서 새로 산 만년필을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리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래 쓰던 만년필을 입적하실 때까지 다시 애지중지하며 사용하셨습니다. “만년필이 없으니 글 쓸 기분이 안 나네”하셨을 때의 그 만년필이 바로 이 만년필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한번 돌아봅니다. 하나만 있어도 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두 개면 충분할 것을 너댓 개씩 갖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이왕이면 손때 묻혀가며 오래 정 붙이고 살 물건을 고려해보세요. 그 물건이 조금은 값이 나가도 괜찮을 겁니다. 어차피 오래 오래 쓸 것이고, 무엇보다 이거 하나만 가질 거니까요.

오늘도 맑고 향기로운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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