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저자 한창수 고려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 “일상의 작은 루틴 실천, 코로나 불청객 무기력 극복의 첫걸음”
어느새 햇수로 2년째인 코로나19 상황. ‘언택트’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일상의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삶의 변화를 반영한 각종 신조어 중 유독 공감을 얻는 말이 ‘코로나 블루’다. 코로나19 시대를 살며 “피곤해 하기 싫고, 해도 안 될 텐데 뭐하러 해”라는 자포자기의 무력감을 많은 이들이 느낀다. 한창수 고려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는 요즘 우리 사회의 집단적 무기력에 주목해 이를 분석하고 해법을 제안한 책 ‘무기력을 무기력하게(알에이치코리아 발간)’를 냈다. 고려대 의대 도서관에서 한창수 교수와 ‘코로나 시대’의 불청객, 무기력을 이겨낼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콤한 ‘위로’보다 극복을 위한 ‘현실적 조언’
한창수 교수는 고려대에서 의학 석·박사를 받고 2007년에는 미국 듀크대에서 임상연구디자인 보건과학 석사를 받았다. 군 전역 후 2001년 고려대의료원 임상강사, 2003년 의과대학 정신과 조교수, 2007년 부교수를 거쳐 2012년부터 현재까지 의과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고대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과장, 안산병원 교육수련부장, 의료원 기금사업본부장을 거쳐 의료원 대외협력실장을 맡고 있다.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저자 한창수 고려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주요 전공은 우울증 및 울분(스트레스), 치매로 2016년부터 2018년까지 보건복지부 국가건강임상연구 우울증 치료 임상연구를 수행했다. 2017년과 2018년에는 다국적 제약사 얀센과 자살시도자 대상의 자살충동 억제제의 국제3상 임사연구를 맡았다. 현재 국가건강영양조사 및 국가검진 우울증 평가도구의 한글판 개발 및 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특히 TV 시청자에게는 KBS1 ‘명견만리’와 ‘생로병사의 비밀’,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등의 프로그램에서 멋진 강의와 조언을 통해 친숙한 얼굴이다. 이렇게 20년 넘게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연구한 그가 무기력이란 주제로 책을 쓴 이유는 무얼까.
“코로나 이후 병원에 온 사람을 보면 우울증이나 PTSD(외상후스트레스장애), 공황장애 등 다양하지만 공통적인 징후가 하나 있다. 바로 ‘피곤하고 의욕이 없다’, ‘업무 퍼포먼스가 떨어진다’ 등이다. 실제로 우울증이라고 병원에 오는 경우는 10% 정도다. 대부분 기운없다, 피곤하다는 증상을 호소한다.”
-마음을 달래는 위로나 힐링을 예상했는데, 그보다는 자기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접근인 것 같다.
“코로나 블루에 대해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은 저 말고도 많으니까. 환자를 병원에서 매일 접하는 의사로서 그냥 ‘네 탓 아니야’, ‘곧 괜찮을 거야’하고 토닥거리기만 하는 것은 직업적으로 무책임하다고 생각했다.”
-책에서 다룬 분야가 다양하다. 무기력이란 테마의 학술 박물관을 안내하는 큐레이팅처럼 느껴졌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무기력에 대한 이론과 연구를 종합하다 보니 꽤 많았다. 정신의학 외에 스포츠의학, 교육학, 심리학 등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어 그것들을 고루 다루었다.”
한창수 교수는 무기력은 일종의 증상이라 원인을 하나로 볼 수 없는데, 그동안 ‘게으름’이나 ‘우울증’으로 단순화시켜 단편적 해법만 제시했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책에서는 무기력의 원인으로 기존의 정신(우울증, 게으른 기질 등) 외에 감정(자존감, 외로움 등)과 몸(질병, 체력 등)을 추가해 짚어보고 있다.
-코로나 시대 무기력은 시대적 현상인가 아니면 사회나 현대인에 내재된 문제가 코로나라는 방아쇠로 표출된 것인가.
“후자에 더 가깝다. 사회가 개별화, 개인화되면서 사람과의 만남이 줄고 교류에 대한 중요성이 낮아졌다. 그런데 코로나가 혼자 모든 걸 해결하는 상황을 당연하게 만들었다. 코로나 사태 초반 노인들이 많이 찾아왔다. 복지센터나 경로당, 가족모임을 통해 노화를 버티던 삶의 루틴들이 코로나로 인해 깨진 것이다. 직장인이나 청년들도 사람을 만나거나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떠는 등의 기제가 없으니 대신 정신과 치료를 찾는다. 역설적이지만 코로나로 인해 정신과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
-‘무기력은 감정이다’에서 자존감과 공감 피로에 대한 부분이 특히 와 닿는다. ‘초연결사회’라는 것이 오히려 스트레스와 무기력의 원인이 되는 듯하다.
“미디어 발달이 무기력을 강화시킨 면이 있다. 사실 외로움과 고독함은 다르다. 외로움은 몸에 해롭지만 고독은 공부나 글쓰기 등 뭔가를 하려고 스스로 선택한 혼자만의 시간이다. 초연결사회로 밀접하게 연결되면서 외로움은 줄어들지만 고독한 시간은 줄었다.”
-SNS 등을 보면 ‘인싸(인사이더)’나 ‘아싸(아웃사이더)’처럼 남의 시선으로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경향이 더 무기력을 부르는 것 같다.
“행복한 사람은 과거의 나와 지금의 자신을 비교한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많은 상황을 남과 비교한다. 하이퍼커넥션으로 다양하게 노는 것 같지만 결국 비교되는 패러다임은 한둘이다. 2000년 대 초반 외국논문에서 다룬 행복한 나라에 북유럽 국가가 많았다. 모두 개인주의가 발달한 나라들이다. 다만 우리는 지금 시간이 좀 필요하다. 현재는 일종의 과도기다.”
-자존심이 강하면 무기력에 빠져도 ‘나는 아니다’라고 부정할 것 같다.
“강한 자존심, 이른바 쫀심이 있으면 무력감이나 번아웃 증상을 부정하고 ‘억압’(내적 감정을 억누르는 심리적 방어기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억눌려진 상태에서 곪을 만큼 곪다가 더 큰 후유증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쉼과 휴식의 필요성도 부정해 더 타격이 크다. 자기 상태를 모니터링하다가 무기력이 오면 원인에 따른 셀프처방을 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
-교수님은 인생에서 심각한 무기력을 경험했을 때 어떻게 극복했는지.
“대학 2학년이 지나던 스무 살 무렵이다. 당시 하늘이 온통 잿빛으로 보이고, 사람도 만나기 싫어 꼭 할 일만 하면서 혼자 있었다. 근처 서점에서 손에 잡히는 책들을 그저 많이 읽고, 시내를 많이 걸었다. 일종의 사회적 철수(retreat)을 하는 기간이었다. 마치 다친 동물이 동굴 속에서 상처가 아물 때를 기다리듯. 요즘에도 책과 영화를 많이 본다. 특히 저녁 때 아내와 동네를 걸으며 대화하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익숙하면서 편한 무기력 방지법인 것 같다.“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 저자 한창수 고려대 의대 정신건강의학교실 교수. 주현희 기자 teth1147@donga.com
몸과 마음의 강화를 통한 셀프 치료
-‘무기력은 몸이다’를 보면 굉장히 구체적인 실천법(운동, 식이요법 등)을 다루었다.“무기력은 멘탈 못지않게 피지컬 관리도 해야 한다. 짜증, 업무 퍼포먼스 저하, 피곤 등은 체력이 떨어지거나 건강이 나빠진 것이다. 체력이 떨어질수록 번아웃 확률도 높아진다. 실제 병원에서도 건강 이야기를 많이 하고 체력관리를 주문한다.”
-‘쉬는 데도 요령이 있다’ 편에서 휴식의 방법을 소개했는데, 사회시스템이 도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조직 내 포스트 코로나 회복력에 대해 강의할 때 개인이 할 일과 조직이 할 일이 따로 있다고 강조한다. 조직에 스트레스 매니저 같은 역할이 있어 개인의 자기효능감 회복이나 쉬는 방법을 도와주어야 한다. 삼성전자의 경우 11개 사업장마다 한 명씩 무려 11명의 정신과 의사가 근무하고 있다.”
-유튜브 크리에이터처럼 혼자 일하는 사람도 많다. 이들이 무기력이나 번아웃을 겪을 때는 조직생활과 다른가.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일정기간 본업과 좀 다른 일을 하며 쉬기를 권한다. 여행을 다녀오거나 안 하던 운동을 하는 것도 좋다. 다만 무조건 쉬는 것이 아니라 일을 다시 시작하는 시기를 정하고 쉬는 게 좋다.”
-현재 준비 중인 책이 있다면
“아직 구상 정도만 있는데 이번 책의 후반부에서 다룬 ‘정신 바짝 차려 루틴 만들어 시작하세요”라고 한 내용으로 뇌과학이나 정신과학적인 부분, 조직과 사회학적인 부분도 다루고 싶다. 현재는 전두엽에 구상을 올려놓고 이런 저런 생각과 책을 읽고 숙성을 하면서 서서히 준비 중이다.“
한창수 교수는 인터뷰를 끝내며 “무엇이든 일상의 루틴을 만들어 작은 일이라도 실천하자”는 실천과제를 강조했다.
“무기력을 극복하는 첫걸음이니 힘들다고 아예 아무 것도 하지 말 것이 아니라 지금 생각날 때 어떤 작은 일이라도 꾸준히 매일 하는 것을 시작하세요.”
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