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은 물이다. 아니 물처럼 흘러야 바둑이다.
그것도 아니다. 흐를 땐 흐르되 부딪쳐야 할 땐 부딪칠 수 있어야 바둑이다. 그것이 고수의 바둑이다.
4개조 본선리그의 첫 판. 이정우와 윤찬희가 바둑판을 마주하고 앉았다. 두 사람 모두 말이 없다. 바둑은 입이 아닌 손으로 말을 한다. 때론 부드럽게, 때론 격렬하게. 주장을 펼치되 논리에 허점이 없어야 한다. 드러나는 순간, 상대는 열흘 굶은 악귀처럼 달려들 것이다.
<실전> 흑1로 걸쳐오자 백은 2로 흑3을 세운 후 4로 들어갔다. 협공을 겸한 갈라치기.
백2로는 <해설1> 1로 순순히 받아줘도 그만이다. 백11처럼 바둑은 흐를 것이다. 물론 이것도 ‘바둑’이다.
흑11로 한 칸 툭 뛰어놓고는 이정우가 기지개를 켠다. 윤찬희는 묵묵히 바둑판을 내려다볼 뿐이다. 스튜디오 안은 대국장 특유의 적막함이 가득하다.
<해설2> 흑1로 먼저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백이 손을 뺀 자리니 이렇게 두고 싶은 게 인지상정. 그런데 백이 괜히 손을 뺀 게 아니다. 흑11까지 백은 좌상귀에서 절호의 선수를 얻을 수 있다. 그런 뒤 해머를 휘두르듯 백12를 냅다 갈겨버리면? 보다시피 흑 석 점이 졸지에 답답해져버린다.
흑이 <실전> 11로 둔 이상 좌상귀의 백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흑19까지 주르륵 흑벽이 쌓였다. 덕분에 이번엔 거꾸로 흑이 21로 백의 정수리에 ‘망치질’을 해댈 수 있게 됐다.
흑21 한 방을 기분좋게 두들겨 놓은 이정우가 자리를 뜨더니 대국장 밖으로 나온다. 창밖으로 오후의 나른한 햇살이 가득하다. 이정우는 눈을 좁혀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씨익 웃었다.
‘다시 시작인가?’
제4기 한국물가정보배 프로기전, 본선리그의 개막. 새로운 바둑사의 한 장이 오후의 햇살을 반사하며 조용히 넘어가고 있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7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