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빈의언제나영화처럼]봄날은간다

입력 2008-12-02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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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강릉’의 이영애였습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정말입니다. 저는 강릉의 이영애였어요. 처음 KBS 아나운서로 입사한 뒤 1년은 지역 근무를 해야 한다는 걸 깜빡 하고 있었나 봅니다. 차에 짐을 바리바리 싣고 대관령 고개를 넘을 때 왈칵 눈물이 나더군요. 강원도가 싫어서가 아니라 철없는 아이같던 제가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1년 동안 혼자 살아야 한다는 데 두려움을 느낀 겁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에 나오는 방송국 기억하시죠? 그 곳이 제가 처음 근무했던 강릉 KBS입니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라디오 PD인 은수의 자리가 있던 사무실이 바로 제가 1년 동안 근무했던 사무실입니다. 저는 외로울 것만 같은 강릉에서의 1년을 스스로 ‘강릉의 이영애’라고 농담삼아 부르며 시작했습니다. 상우와 은수가 자판기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곳은 2층 라디오 스튜디오 앞입니다. 매일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직접 진행했던 은수처럼, 저도 그 스튜디오 안에서 매일 1시간씩 ‘FM음악여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습니다. 지역 방송사엔 라디오 PD가 없기 때문에 영화 속 은수처럼 직접 기계를 만지고 선곡을 하고, 코너를 짜며 가끔 글도 썼습니다. 외로울 줄 알았던 강릉에서의 1년. 지나고 보니 그리 외롭진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행복했던 것 같아요. 유지태씨처럼 미소가 아름다운 선배들이 있었고, 시간이 잘 안 간다며 조급해하던 제 마음을 달래주는 아름다운 강원도의 자연이 있었습니다. 바닷가 앞 예쁜 카페도, 삼척까지 달려가 찾던 절벽 위 스파게티집도, 이맘때 양미리 축제를 하던 항구도, 모두 눈에 선합니다. 엄마 아빠가 보고 싶고, 아는 사람도 할 일도 없다며 짜증내던,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도 이기적이고 어린 아이 같던 제가 마음을 터놓던 선배는 말했습니다. “강릉에 있는 1년을 즐겨라. 나중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다”고. 은수와 상우는 ‘소리’를 매개로 친해졌죠. 저도 그 곳에서 ‘라디오’를 통해 소중한 추억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불현듯 마지막 날이 됐을 때, 이삿짐을 챙기느라 바쁜 저는 인사도 제대로 못한 채 서울로 왔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죠. 서울로 오면 기쁠 줄 알았는데 강릉을 떠나며 저는 대관령에서 다시 한 번 눈물을 쏟았습니다. 지금은 ‘봄날은 간다’를 다시 보는 것도, 강릉을 찾는 것도 두렵습니다.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던 상우의 마음처럼 제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변해 있을 것만 같아 두렵습니다. 내가 사랑했던 라디오도…, 내가 사랑했던 강원도의 풍광도…,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도…. 아마 상우를 모질게 내치던 은수는 몰랐을 겁니다. 시간이 지난 후 가끔 미친 듯이 상우가 보고 싶어질 거라는 걸. 제가 그 때 아무 것도 몰랐던 것처럼. 가끔 다시 한 번 강릉의 이영애로 돌아가고 싶어요. 조수빈 꿈많은 KBS 아나운서. 영화 프로 진행 이후 영화를 보고 삶을 돌아보는 게 너무 좋아 끄적이기 시작함. 영화에 중독된 지금, 영화 음악 프로그램이나 영화 관련 일에 참여해보고 싶은 욕심쟁이, 우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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