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플러스]용감한 형제 “왼팔가득 문신 때문에 검문에 자주 걸려요”

입력 2011-12-23 10: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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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올해의 한류 작곡가상
●조폭 꿈꾸던 소년원생 과거, 숨기지 않은 이유는
●막노동꾼, 굶어가면서도 '음악' 꿈 놓지 않아
●일중독 "성격이 지랄 같아서 일 남겨 놓고 못 자"
●사랑도 결혼도 브레이브엔터 YG만큼 키우기 전까지 휴업

"방황하고 싶으면 마음껏 해요. 단, 제 자리 찾아오는 것도 자기 책임이에요. 부모가 안 잡아줘서 망가졌다고요? 핑계죠. 혼자 못 돌아온다면 원래 그런 인간인 거예요."

서릿발 같은 눈매, 단단한 어깨, 까칠한 콧수염… 격투기 선수 같은 인상이다. K-POP을 대표하는 작곡가 겸 프로듀서 용감한 형제(본명 강동철·32)다.

지금은 브레이브 엔터테인먼트 대표로 신인그룹 브레이브걸스, 일렉트로보이즈를 길러낸 어엿한 제작자지만, 그도 한때는 파란만장한 청소년기를 보낸 '문제아'였다. 17살에 학교 폭력으로 소년원에 수감됐고, 보호관찰처분이 끝난 19세에도 룸살롱 영업부장을 하며 거친 길을 갔다. 어린 그의 꿈은 조직폭력배였다.

방황하는 10대들에게 한 마디 해달라고 하자, 그는 "자기가 싼 똥 자기가 치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기 인생이 값지다는 걸 알 수 있다"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제 삶이 '무릎팍 도사', '승승장구'를 통해 알려진 뒤로 인터넷 쪽지를 보내오는 친구들도 많아요. 다 읽어봅니다. 그러나 잠시잠깐의 충격으로 행동을 바꾸는 건 힘들어요. 중요한 건 스스로의 노력이죠."

그 시절 모습은 아직도 남아 있다. 지금도 그의 왼팔에는 시커먼 문신이 가득하다. 저작권료와 프로듀싱비로 4년에 50억원이 훌쩍 넘는 돈을 버는 이 남자는 문신 때문에 사업차 해외에 나가고 들어올 때마다 공항에서 강도 높은 검문을 받는다고 한다.

"처음 문신을 한 건 10대 때예요. 팔 다리에 자해한 흔적이 많아서 감추려고 문신을 했는데, 돈이 없어 말도 안 되는 그림을 막 판 거예요. 그걸 커버하느라 문신이 더 커졌어요. 수술을 하려고 했더니 병원에서 못 없앤다고 하더라고요. 살을 몇 번 더 찢어야 하는데, 그러면 흉터가 더 커진다고. 나이 먹으니 후회돼요."

어색함을 감추려는 듯 그는 '으하하하'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무라이처럼 날 선 눈매가 어린애처럼 순해졌다. "그래요, 많이 웃으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갱생기는 눈물겨웠다. 배운 것이 없이 어쩌다보니 '어두운 길'로 들어서게 됐다지만, 업소 DJ 동생이 틀어준 힙합음악을 듣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고 한다.

"미치도록 뭔가를 하고 싶었던 건 처음이었어요. '이런 음악을 해보자'는 생각에 가진 돈을 털어 음악 장비를 샀어요. 모범생 형 강흑철(예명 미스터 강)까지 의기투합했죠. 영화 같은 일이죠. 저도 하느님이 주신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집을 나와 고려대학교 공사장에서 등짐을 지는 막노동을 하며 밤마다 음악만 공부했다. 등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났지만 다음 날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하러 나갔다. 악기 살 생각에 굶기도 예사였다. 주먹 쓰며 쉽게 돈 벌던 옛날로 돌아가고 싶은 적도 있었다. 그 때마다 그를 붙잡은 건 음악이다.

"막노동을 하면 사람들이 무시해요. '아무것도 아닌 XX가!' 싶다가도 참죠. 정말 힘들면 소주 4병사서 사탕 한 개 안주 삼아 형이랑 둘이 마셨어요. 건달로 돌아가긴 싫었어요. 마지막에는 배고파 굶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음악만 했어요."

아버지의 도움을 받은 건 단 한 번이다. 아버지는 형을 통해 악기 하나를 사서 보냈다. 그래도 음악 하는 걸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 큰 아들 둘이 하루 종일 음악만 하고 있으니 답답했을 터.

그는 그렇게 만든 곡을 들고 YG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갔다.

"준비했던 1번곡이 사회 정치 풍자 가사를 담고 있어죠. 용감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라는 생각에 용감한 형제라는 예명을 지었어요. 비판 의식이 있기 보다는 언론에서 나오는 대로 써서 지금 보면 부끄럽죠."

그럼 언제 용감한 형제의 형, 강흑철과 헤어졌을까.

"혼자 된 건 오래됐어요. 2004년 양현석 형의 제안을 듣고 프로듀서로 전향했어요. 흑철 형은 엔지니어 공부를 시작했고요. 렉시의 '눈물 씻고 화장하고'라는 첫 타이틀을 썼는데, 용감한 형제를 버리기가 싫더군요. 그래서 예명을 가져갔죠."

양현석 YG 대표는 그의 롤 모델이 됐다. 그는 "나의 사수"라고 표현했다. 2008년 YG를 나온 그는 브레이브 엔터테인먼트를 세우고 실력파 프로듀싱을 바탕으로 가수를 키웠다. 직원 30명은 그의 든든한 우군이다. 10월에는 서울 논현동 신사역 부근에 힙합클럽 '팬덤'을 오픈하기도 했다.

'일중독'인 그는 집도 없이 논현동 사옥 꼭대기 층에 살며 하루 3~4시간씩 자고 일한다.

"성격이 지랄 같아서 일 남겨 놓고 못 자요. 힘들지 않느냐고요? 오너가 후회하는 순간 회사가 휘청댑니다. 사랑도 결혼도 회사를 YG만큼 대형기획사로 키우기 전까지는 휴업합니다."

그의 회사에는 연습생 17명이 있다. 가수 지망생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뭘까.

"목적의식과 끈기죠. 요즘 아이들은 간절함이 많이 없어요. 쉽게 그만두고, 나약해요. 그런 사람은 저에게 욕만 진창 먹죠. 가수를 꿈꿨으면, 톱 가수가 되겠다는 목표로 미치도록 연습했으면 해요. 잘 되는 사람은 눈빛부터 달라요."

문뜩, 고등학교를 중퇴한 그가 사회 '주류'로 우뚝 선 지금 왜 어두운 과거를 고백했는지가 궁금했다. 이미지를 깎아먹는 일이 될 수도 있기 때문.

"분명히 누군가는 내 얘기를 할 거예요. 그 때 얼버무리고 핑계를 대는 건 성격상 맞지 않아요. 젊은 시절도 지울 수 없는 저의 일부분입니다. '나 그런 놈이었어!'라고 자랑하는 게 아니라, 지금은 그걸 끊고 떳떳하게 산다는 걸 알리고 싶었어요. 저는 그 시절을 통해 얻은 게 많아요. 세상에 쉽게 얻을 건 없다는 걸 알았고, 간절함도 알았죠. 그래서 제가 이 나이에 이 위치에 설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지난 15일 용감한 형제는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한류작곡가상을 받았다. 손담비의 '미쳤어' '토요일 밤에', 브라운아이드걸스의 '어쩌다', 빅뱅의 '마지막 인사', 이승기의 '정신이 나갔었나봐', 씨스타의 '소쿨(So Cool)' 등 그가 만들어낸 말랑말랑한 히트 곡이 인정을 받은 것이다.

"3~4년 전이라면 기뻤겠지만, 지금은 작곡가보다는 제작자로 마음이 돌아섰기 때문에 크게 기쁘지 않았어요. 대신 대한민국 최고 한류제작자상이라는 새 목표가 생겼죠."

그는 어린시절부터 '배포' 하나는 있었다고 했다.

"깡이 있고, 들이대는 것 좋아하고, 무작정 도전하는 것 좋아하고…. 아버지가 가진 것 없는 놈이 배포만 크다고 말씀 하셨죠. 자기 전에는 항상 상상해요. 내가 언제까지 무얼 가지고 있을지 계획하죠. 그러다 보면 정말로 그게 이뤄져요."

용감한 형제를 성공케 한 것은 긍정의 힘이었다.

글 최현정 기자 phoeb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박영욱 동아닷컴 기자 pyw06@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 브레이브 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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