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을 보면 (김)명민 선배가 있고 오른쪽을 보면 (천)호진 선배가 있으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어요. 제가 운이 좋은 거죠.(웃음)”

배우 진선규가 웃으며 말했다. 대학로에서 공연을 하던 배우가 지상파 드라마에 진출했을 때 “운이 좋았다”, “감사하다”는 말을 인터뷰에서 듣는 것은 수학 공식과도 같은 뻔한 소감이다. 하지만 진선규의 입에서 나온 말의 느낌은 달랐다. 겸손함이 묻는 진심이라고나 할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꼭 누군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이고 후배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며 챙기려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진선규를 만났을 때는 SBS 월화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한창 촬영 중이었다. 추운 날씨에 촬영을 한 터라 지연도 많이 생기는 상황이 발생해 쉬는 시간이 그때그때 달랐다. 인터뷰 날짜도 일주일 동안 딱 하루 쉴 수 있었던 시간을 이용했다. 쉬는 날 불러내서 미안하다고 하니 그는 “괜찮다. 내가 ‘육룡이 나르샤’로 인터뷰를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고 배시시한 웃음을 보였다.

진선규는 ‘육룡이 나르샤’에서 남은 역을 맡았다. 남은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으로 정도전 등과 함께 조정의 신진 사류로서 이성계 일파의 중심인물이 된 인물이다. 처음 이 역을 받았을 때 그는 믿겨지지 않은 눈치였다. 그는 “실존 인물인데다 분량도 생각지 못하게 많았다. 역사가 스포라고 하지 않나. 드라마 끝까지 나오게 된 역이여서 정말 기뻤다”라고 말했다.

“예전에는 흔하지 않던 일이죠. 신경수 감독님은 배우들의 얼굴을 잘 비춰주시니까 그것만큼 힘이 되는 것도 없어요. 감독님도 위험을 무릅쓰고 연극배우들을 캐스팅하시는 거예요. 대부분은 ‘이번에는 그렇고, 나중에 같이 하자’라고 에둘러 표현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이죠. 신 감독님과는 ‘쓰리데이즈’부터 인연이 있었는데 그 때도 정말 잘 챙겨주셨거든요. 제 공연도 자주 보러 오시고요. 그런데 또 다시 ‘육룡이 나르샤’에서 뵐 줄은 몰랐어요. 은인 같은 분이예요.”


하지만 마냥 좋아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촬영장에서 왼쪽으로 눈을 돌리면 배우 김명민이 있고 오른쪽으로 돌리면 배우 천호진이 있었다. 대학로에서 잔뼈가 꽤나 굵은 진선규라지만 대선배들 앞에서는 시쳇말로 ‘쫄게 되는’ 상황이다. 그는 웃으며 “처음엔 진짜 잔뜩 주눅들어있었다”라고 말했다.

“선배님들은 촬영장에서 ‘슛’이 들어가기 전까지 자신의 캐릭터에 몰입하셔야 하니까 아무 말씀도 안 하세요. 그래서 좀 쫄았죠.(웃음) 그러다가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 제 연기의 방향이 조금 다르면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조언도 해주시고요. 덕분에 제가 연기에 대해서 걱정할 것은 없었어요. 선배님들이 다들 너무 잘하셔서 저는 정말 ‘수저’만 얹었어요. 하하.”

무대에는 수없이 올랐지만 카메라 앞에 섰던 기분은 어땠을까. 그는 “연기를 하는 것은 같지만 확실한 차이는 있다”고 말했다. 관객 앞에서 선 무대 연기는 온 몸으로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할 수 있지만 카메라 앵글 앞에선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 진선규는 “순간적인 집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카메라 앵글에 클로즈업 되면 제가 연기할 수 있는 공간은 얼굴 외에는 없어요. 그래서 눈빛이 조금이라도 ‘가짜’라고 느껴지면 안 됐어요. 모든 연기를 ‘진짜’처럼 해야 하지만 무대 위에서의 ‘진짜’와 카메라 앞에서의 ‘진짜’는 연기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선배들이 짧은 순간에 집중을 하시는 모습에 감탄했어요. 그냥 보기만 해도 수업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죠.”

‘육룡이 나르샤’에는 진선규 말고도 연기로 인정받은 대학로 배우들의 출연이 많았다. MBC ‘라디오스타’에서 화려한 입담을 펼치며 캐스팅도 화제가 됐던 ‘장삼봉’ 역에 서현철부터 ‘지란 성님’ 역에 박해수, 조준 역에 이명행을 비롯해 장승조, 홍우진, 전성우 등이 크고 작은 분량에서 드라마를 틈틈이 채워갔다. 진선규는 낯선 촬영 현장에 대학로 동료들을 만나니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라고 말했다. 특히 자신의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이하 극단 ‘간다’)의 홍우진의 활약을 잘 봤다고.


“우리는 아무래도 작가님들께는 신인 배우와도 같은 존재잖아요. 그래서 저희를 어떻게 쓰셔야 할지 잘 모르셨을 거라 생각해요. 그래서 감독님이 더 아쉬워하셨던 것은 우진(자살을 한 유생 역)이가 1회에 그냥 죽었다는 거였어요. ‘이렇게 잘 하는 줄 알면 살려둘 걸’ 싶으실 정도였다고 하니까요.”

앞으로 진선규는 브라운관과 스크린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인기를 바래서도,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연기를 점검하는 자신만의 연기 수업을 재시작하길 바랐다. 최근 영화 ‘사냥’을 촬영하면서도 자신의 연기를 점검하며 고쳐야 하는 나쁜 습관 등을 발견하기도 했다고.

“‘좋은 배우가 뭐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관객들의 사랑 덕분에 무대에 끊임없이 오르는 배우가 됐지만 여기서만 잘하는 배우가 돼선 안 되지 않을까란 마음이 들었어요. 어딜 가서든 연기를 잘 해야 되는 게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배우가 되기 위해 꼭 거쳐야 하는 수업, 혹은 세계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당분간 극단 ‘간다’의 공연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순 없을 것 같다. 올해로 11주년이 된 극단 ‘간다’는 재정비를 위해 서울을 떠나 지방을 돌며 그야말로 ‘공연 배달’을 시작한다. 진선규도 처음엔 참여를 하고 싶었지만 이리저리 분산된 연기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싫어 참여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기왕에 마음먹었으니, 집중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서 결정한 거예요. 제가 앞으로 매체 연기를 하며 무엇을 잘하는지 못하는지 발견하고 고쳐서 다시 무대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또 다른 세계에서 잘 배우고 있겠습니다. 앞으로 극단 ‘간다’도 계속 관심 가져주시고 제 발전하는 모습도 지켜봐주세요.”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사진|동아닷컴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