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臣)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이충무공전서) 이순신은 꺾이지 않는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세계 해전사에 기록된 완전한 승리를 얻음으로써 휘하와 백성의 두려움을 떨쳐냈다. 스스로 결단하고 스스로 당당히 나아간 투혼이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12 vs 133…왜군 몰아낸 명량해전
절대적 불리함 속 늘 앞장서서 지휘
투혼과 소통 있었기에 가능한 승리
이순신이 어머니의 원통한 부음을 접한 건 1597년 음력 4월13일이었다.
전란의 와중에도 끊이지 않은 당쟁에 휘말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됐다. 투옥된 이순신은 겨우 목숨을 구해 그해 4월 초하루(이하 음력) 풀려났다. 임금 선조는 아무런 직책도, 직급도 주지 않은 채 도원수 권율의 휘하에서 싸우라고 그에게 명했다. 백성 된 자로서, 전란에 처한 전직 군인으로서 이순신은 임금의 명을 받들었다. 그리고 한양 의금부에서 출발해 초계(경남 합천)의 도원수부까지 640km에 달하는 길을 나섰다.
1597년 4월13일
맑다.(중략) 종 순화가 어머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했다.전라좌수영(전남 여수)에 머물던 어머니는 ‘백의종군’의 길 위에 나선 아들이 선영이 있는 충남 아산으로 향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에 올랐다. 법성포(전남 영광)와 안흥(충남 태안)을 거쳐 풍랑을 헤치며 바다를 내달리던 차였다. 이미 83세의 노구는 병이 나고 말았고, 결국 아들의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장수 그리고 전선(戰線)에서
1597년 9월9일
맑다.(중략) 나는 비록 상복을 입은 몸이지만 여러 장수들과 군졸들이야 먹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제주에서 끌고 온 소 다섯 마리를 녹도, 안골포 두 만호에게 주었다.
봄날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가 다시 돌아가는 날, 중양절(重陽節). “1년 가운데 손꼽히는 명절이다”. 하지만 그는 이날을 뭇 백성들과 같이 즐길 수 없었다.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낸 죄인으로서 상복을 벗으면 안 되었다.
무엇보다 8월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장수로서 적들의 침입과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이미 이틀 전 “적선 13척이 곧바로 우리가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다가왔”고, 중양절 당일에도 “늦게 적선 두 척이 어란포(전남 해남)로부터 바로 감보도(전남 진도)로 와서 우리 수군의 수를 정탐하려고” 하는 등 적은 끊임없는 교란과 침입을 자행하던 터였다.
하지만 장수의 슬픔이나 개인적인 감정은 오로지 속으로, 속으로만 삭여야 하는 것이었다. 전란의 와중에 겪은 당쟁이라는 어이없는 조정의 혼란, 수많은 휘하들의 목숨이 내걸린 전선을 지키지 못한 장수로서 견뎌내야 했던 무력감, 거기에 더해 어머니를 잃은 아픔은 깊고도 깊었다.
어머니가 떠나가던 날 “방을 뛰쳐나가 슬퍼 뛰며 뒹굴었더니 하늘에 솟아 있는 해조차 캄캄하였”을 만큼 애끊는 심정은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중양절 다음날 이순신은 “날씨가 흐리고 비가 올 것 같았다. 혼자 배 위에 앉아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 나와 같이 외로운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며 속으로, 속으로만 통곡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전란에 처한, 전선을 지켜내야 하는 장수로서 마땅한 심정의 처리였다. 그것 외에 어디에도 이순신 개인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래서도 안 되었다.
그것이 장수였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
1597년 9월15일
맑다.(중략)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서 “병법에 이르기를 ‘죽으려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는다’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하고 엄하게 약속하였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기 직전인 7월 초중순 조선 수군은 칠천(경남 거제)에서 대패했다. 수군은 두려움에 떨었다. 살아남은 배는 단 12척. 벽파진(전남 진도)에 진을 친 이순신과 휘하들 앞에 나타난 적선은 130여척이었다. 9월16일이었다.
“온 배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돌아다보며 얼굴빛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전 경상우수사 배설은 칠천 대패의 문책을 피하려 했고, 그달 초 이튿날 “새벽에 도망”갔다. 130여척의 적선 앞에서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멀리 떨어져 가물가물”할 만큼 “벌써 2마장(706m) 밖에 나가” 있었고, “여러 장수들은 양쪽의 수를 헤아려 보고는 모두 도망하려는 꾀만 내고 있었”다.
이순신은 홀로 나섰다. “내 배가 머리를 돌리면 여러 배가 점점 더 멀리 물러나고 적들이 다 덤벼들 것 같아서 나가지도 돌아서지도 못할 형편이 되었다.”
그렇게 나아가는 이순신을 결국 미조항 첨사 김응함과 거제 현령 안위 등이 뒤따랐다. 마침내 휘하들은 “우리 배들이 적을 물리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일제히 북을 올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적선을 쫓았다. 31척의 적선은 파괴돼 침몰했고, 적들은 쫓겨 도망쳤다.
앞서 도망하는 휘하들을 바라보며 이순신은 군법과 군율에 의거해 “먼저 목을 베어다가 내걸고 싶”었다. 하지만 이순신은 홀로 나섰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군법과 군율은 냉엄한 명령체계이다. 동시에 위아래 사이 가장 유효하고 강력한 소통의 길이기도 하다. 다만 명령은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온당해야 한다. 소통은 그것을 마땅한 의무로 이행할 수 있게 한다. 그렇게 군법과 군율은 위와 아래가 동의하고 받아들임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어서, 전선의 위태로움에 놓인 위와 아래를 서로 살려내는 유일한 무기가 될 것이다.
적의 침입과 교란의 때마다 이순신은 “곧바로 앞장을 서서” 적에 맞섰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이며 온당한 명령에 앞서 스스로 적 앞에 당당히 나아갔다. 휘하들이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군법과 군율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다. 명령과 소통으로써 서로가 서로를 살려낼 유일한 무기가 정비되었다면, 장수는 이제 맨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이순신은 말했다. “두려움을 용기로 바꿀 수만 있다면!”(영화 ‘명량’)
백성과 휘하들이 두려움에 떨 때 홀로 그 앞에 나서며 목숨을 내걸어 처절한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것, 명령과 소통의 엄정함 그 진정한 의미를 오롯이 지켜내는 것.
그것이 장수이며, 장수의 단 하나 할 일이었다.
P.S. 고딕 부분과 따옴표 부분은 서해문집 출간 ‘난중일기: 임진년 아침이 밝아 오다’(이순신 지음·송찬섭 엮어옮김)에서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영화 ‘명량’의 한 장면.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 영화 ‘명량’은?
1597년 9월 이순신과 그가 이끈 조선 수군이 왜군에 맞섰던 명량해전을 그렸다. 그해 7월 수군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한 뒤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고, 남은 전선(戰船) 12척으로 왜군 133척을 맞아 싸우며 승리했다. 김한민 감독의 2014년작. 1700만여 관객을 불러 모아 역대 최고 흥행작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민식이 이순신 역을 맡아 전선에 나선 진정한 장수의 모습으로 관객의 커다란 지지를 얻었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