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역시 새옹지마입니다.”
배우 옥희(가명) 씨에게 2024년의 마무리는 ‘새옹지마’다. 그가 운영하는 Facebook 계정(옥희) 인사말에는 “사람 얕잡아 보고 함부로 이용해도 괜찮다고 믿는 자들의 착각이, 긴 소송과정을 통해 잘못되었음을 확인받았습니다. 저는 영화감독 김기덕을 고소한 배우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옥희 씨는 올해 ‘김기덕에게 성폭행당한 여배우’라는 언론의 오보에 대해 MBC 정정 반론 보도를 마지막으로 길었던 싸움을 마무리했다.
“MBC PD수첩 보도까지 문제가 있었음을 인지한 후 이를 바로잡기 위해 2019년 언론사 오보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언론 오보 소송을 결심하게 만든 MBC 정정 반론 보도를 마지막으로 언론사 오보 소송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지난 12월 11일은 김기덕 감독의 사망 4주기였다. 그는 4년 전 이날 향년 59세의 나이로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김기덕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거장이었다. 김 감독은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 베니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본상을 받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은 왜 그렇게 쓸쓸했을까.
그가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8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미투(Me too) 운동’ 무렵이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고, 성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게 된 ‘미투 운동’의 물결에서 문화·예술계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기덕 감독이 있었다.
2018년 3월 6일, MBC ‘PD수첩’은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편을 통해 그와 배우 조재현의 성폭력을 고발해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왔다. 당시 옥희 씨는 방송에서 김기덕 감독의 폭행·성추행 의혹을 증언했다. 그를 비롯해 김 감독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이들의 다양한 증언이 쏟아졌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사실관계 확인 및 내사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자 김기덕 감독은 2019년 3월, 자신을 둘러싼 폭행·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여배우와 MBC를 상대로 10억 원에 달하는 민사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법원은 2020년 10월, 김기덕 감독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소송 비용도 김기덕 감독이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김 감독은 동년 11월, 2심 항소를 한 뒤 사망했다.
김기덕 감독의 사망으로 사건은 종결됐지만, 옥희 씨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남았다. 폭행·성추행만 폭로했던 그에게 ‘김기덕 감독에게 강간당한 여배우 A 씨’라는 오명이 쓰인 것. ‘PD수첩’ 보도가 문제가 있었음을 인지한 옥희 씨는 2019년 언론사 오보 소송을 시작했다.
“저는 160곳 가까운 대한민국 거의 모든 언론사와 무려 5년간 소송을 했고, 대법원 판결도 2차례나 승소했습니다. 고법 판결 승소도 많았습니다. 소송이 많으니 많은 판사님을 만났고 드나든 법원도 여러 곳이었습니다. 이 소송에 참여한 언론사 측 변호사들, 서초동 대형 법무법인은 물론 중소 법무법인 개인 변호사들의 숫자도 엄청날 것입니다. 언론사 측 변호사들은 김기덕 원사건 고소장까지 입수해 제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했습니다. 김기덕 사건을 하며 제가 단 한 번의 거짓이나 과장을 했다면 언론사 소송 법정공방 중 다 털렸을 것입니다. 저를 향한 뒤늦게 들려오는 억울한 소리도, 누군가의 뒤틀린 마음의 소리라 무시하고자 합니다.”
옥희 씨가 간절한 마음으로 언론사 오보 소송을 시작했고, 패소를 인정하지 못했던 김기덕 감독은 2심 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멀리 타국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김기덕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옥희 씨에게도 충격이었다. 김 감독 사망 후 유족이 이어간 소송은 옥희 씨의 완전 승소로 마무리됐으나, 누구에게도 사과를 받을 길 없었던 옥희 씨의 마음은 너무나 허탈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묻더군요. 고인이 사망해 사과조차 못 받게 된 현실에 대한 분노는 어떻게 하냐고.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사망 소식을 들은 후, 김기덕에 대한 감정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 같았어요. 김기덕에 대한 감정이 제 감정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어요. 이건 제가 노력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새삼 죽음이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옥희 씨의 상처는 흉터가 되어 영원히 남았다. 하지만, 그의 싸움은 영화계를 비롯해 문화·예술계에 경종을 울렸다. 그런가 하면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점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당시 미투에 대한 지지도 엄청났지만, 잠시 뒤 미투에 대한 반발도 컸습니다. 일부 위정자들은 이를 갈라치기의 도구로 이용하는 듯 보였고 일부에선 반감에 혐오 발언을 쏟아 내며 자기 이름을 알리는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미투가 한때 유행처럼 지난 점에 대해서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젠 균형감각 있는 논의가 필요한 때라 생각합니다. 갈라치기의 도구로 쓰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옥희 씨의 말처럼 미투 광풍은 너무도 자극적으로 사회를 휩쓸고 홀연히 사라졌다. 지금도 이 사회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위계에 의한 성범죄를 당하고 주저앉아 홀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미투가 단순한 이슈몰이로 소비되어선 안 되는 건 바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사안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타인을 착취하는 행위, 권력관계의 문제는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세상은 이걸 ‘갑질’이라 부르고 그중 성(性)과 관련된 부분을 따로 분류한 것이 미투고요. 정치와 이념이 끼어들지 않게 간혹 남의 아픔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자들을 배제한 논의가 다시 한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옥희 씨의 언론사와의 기나긴 소송의 여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정회석 변호사(법무법인 온조)는 가해자의 유명세에 따라 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왜곡된 시선들로 인해 피해 사실에 대한 정정보도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댓글에서 여전히 옥희 씨의 피해사실을 오해하는 등 2차 가해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슬비 동아닷컴 기자 misty8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배우 옥희(가명) 씨에게 2024년의 마무리는 ‘새옹지마’다. 그가 운영하는 Facebook 계정(옥희) 인사말에는 “사람 얕잡아 보고 함부로 이용해도 괜찮다고 믿는 자들의 착각이, 긴 소송과정을 통해 잘못되었음을 확인받았습니다. 저는 영화감독 김기덕을 고소한 배우입니다”라고 적혀있다.
옥희 씨는 올해 ‘김기덕에게 성폭행당한 여배우’라는 언론의 오보에 대해 MBC 정정 반론 보도를 마지막으로 길었던 싸움을 마무리했다.
“MBC PD수첩 보도까지 문제가 있었음을 인지한 후 이를 바로잡기 위해 2019년 언론사 오보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언론 오보 소송을 결심하게 만든 MBC 정정 반론 보도를 마지막으로 언론사 오보 소송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지난 12월 11일은 김기덕 감독의 사망 4주기였다. 그는 4년 전 이날 향년 59세의 나이로 라트비아에서 코로나19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김기덕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거장이었다. 김 감독은 세계 3대 영화제로 꼽히는 칸, 베니스,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본상을 받은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마지막은 왜 그렇게 쓸쓸했을까.
사진=MBC
그가 내리막을 걷기 시작한 것은 지난 2018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미투(Me too) 운동’ 무렵이었다. 사회 전반에 걸쳐 성폭력 피해자들이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공론화되고, 성범죄의 심각성을 알리게 된 ‘미투 운동’의 물결에서 문화·예술계 역시 피해 갈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김기덕 감독이 있었다.
2018년 3월 6일, MBC ‘PD수첩’은 ‘영화감독 김기덕, 거장의 민낯’ 편을 통해 그와 배우 조재현의 성폭력을 고발해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몰고 왔다. 당시 옥희 씨는 방송에서 김기덕 감독의 폭행·성추행 의혹을 증언했다. 그를 비롯해 김 감독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이들의 다양한 증언이 쏟아졌지만, 공소시효 만료로 사실관계 확인 및 내사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자 김기덕 감독은 2019년 3월, 자신을 둘러싼 폭행·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여배우와 MBC를 상대로 10억 원에 달하는 민사소송을 걸었다. 하지만 법원은 2020년 10월, 김기덕 감독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소송 비용도 김기덕 감독이 부담하라고 판결했다. 김 감독은 동년 11월, 2심 항소를 한 뒤 사망했다.
김기덕 감독의 사망으로 사건은 종결됐지만, 옥희 씨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흔이 남았다. 폭행·성추행만 폭로했던 그에게 ‘김기덕 감독에게 강간당한 여배우 A 씨’라는 오명이 쓰인 것. ‘PD수첩’ 보도가 문제가 있었음을 인지한 옥희 씨는 2019년 언론사 오보 소송을 시작했다.
“저는 160곳 가까운 대한민국 거의 모든 언론사와 무려 5년간 소송을 했고, 대법원 판결도 2차례나 승소했습니다. 고법 판결 승소도 많았습니다. 소송이 많으니 많은 판사님을 만났고 드나든 법원도 여러 곳이었습니다. 이 소송에 참여한 언론사 측 변호사들, 서초동 대형 법무법인은 물론 중소 법무법인 개인 변호사들의 숫자도 엄청날 것입니다. 언론사 측 변호사들은 김기덕 원사건 고소장까지 입수해 제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을 했습니다. 김기덕 사건을 하며 제가 단 한 번의 거짓이나 과장을 했다면 언론사 소송 법정공방 중 다 털렸을 것입니다. 저를 향한 뒤늦게 들려오는 억울한 소리도, 누군가의 뒤틀린 마음의 소리라 무시하고자 합니다.”
옥희 씨가 간절한 마음으로 언론사 오보 소송을 시작했고, 패소를 인정하지 못했던 김기덕 감독은 2심 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멀리 타국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김기덕 감독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옥희 씨에게도 충격이었다. 김 감독 사망 후 유족이 이어간 소송은 옥희 씨의 완전 승소로 마무리됐으나, 누구에게도 사과를 받을 길 없었던 옥희 씨의 마음은 너무나 허탈했다.
“누군가가 저에게 묻더군요. 고인이 사망해 사과조차 못 받게 된 현실에 대한 분노는 어떻게 하냐고.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사망 소식을 들은 후, 김기덕에 대한 감정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 같았어요. 김기덕에 대한 감정이 제 감정이 전혀 작동하지 않았어요. 이건 제가 노력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새삼 죽음이 인생의 한 장을 마무리한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옥희 씨의 상처는 흉터가 되어 영원히 남았다. 하지만, 그의 싸움은 영화계를 비롯해 문화·예술계에 경종을 울렸다. 그런가 하면 완벽하게 해결되지 않은 점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기도 했다.
“당시 미투에 대한 지지도 엄청났지만, 잠시 뒤 미투에 대한 반발도 컸습니다. 일부 위정자들은 이를 갈라치기의 도구로 이용하는 듯 보였고 일부에선 반감에 혐오 발언을 쏟아 내며 자기 이름을 알리는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미투가 한때 유행처럼 지난 점에 대해서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젠 균형감각 있는 논의가 필요한 때라 생각합니다. 갈라치기의 도구로 쓰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옥희 씨의 말처럼 미투 광풍은 너무도 자극적으로 사회를 휩쓸고 홀연히 사라졌다. 지금도 이 사회 어딘가에서는 누군가 위계에 의한 성범죄를 당하고 주저앉아 홀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지 모른다. 미투가 단순한 이슈몰이로 소비되어선 안 되는 건 바로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인 사안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진 힘을 이용해 타인을 착취하는 행위, 권력관계의 문제는 어디서나 일어납니다. 세상은 이걸 ‘갑질’이라 부르고 그중 성(性)과 관련된 부분을 따로 분류한 것이 미투고요. 정치와 이념이 끼어들지 않게 간혹 남의 아픔을 입신양명(立身揚名)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자들을 배제한 논의가 다시 한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옥희 씨의 언론사와의 기나긴 소송의 여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함께 했던 정회석 변호사(법무법인 온조)는 가해자의 유명세에 따라 그를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왜곡된 시선들로 인해 피해 사실에 대한 정정보도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댓글에서 여전히 옥희 씨의 피해사실을 오해하는 등 2차 가해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슬비 동아닷컴 기자 misty8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