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카일러(오른쪽)과 디디는 극이 다 끝나갈 때가지 오직 무전으로만 관계를 이어간다.  ‘라져’는 관제라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소재를 무대로 옮겨온 작품이다.                       사진제공 | 창작하는공간

스카일러(오른쪽)과 디디는 극이 다 끝나갈 때가지 오직 무전으로만 관계를 이어간다. ‘라져’는 관제라는 친숙하면서도 낯선 소재를 무대로 옮겨온 작품이다. 사진제공 | 창작하는공간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뮤지컬 ‘라져(ROGER)’는 관제탑이라는 낯선 공간을 무대로 끌어왔다. 비행기를 직접 모는 사람이 아니라, 그 비행기를 안전하게 이끄는 사람. 한마디로 ‘뒤에서 다 해주는 사람들’ 이야기다. 대학로 NOL 서경스퀘어 스콘 2관에서 공연 중으로, 2025 공연예술창작산실 ‘올해의 신작’에 선정됐다.

등장인물은 단 두 명. 요즘 대세인 2인극이다. 흥미로운 건 이 둘은 극이 다 끝나갈 때까지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오직 목소리. 오직 교신. 이 주어진 제한이 긴장감을 꽈배기 꼬듯 만들어낸다.

제목 ‘라져’는 “들었고 이해했다”는 뜻의 항공 교신 용어다. 어릴 때 장난감 무전기로 “알았다, 오바!”를 외쳤던 기억이 있다면 바로 그 느낌이다. 짧고 건조한 이 한마디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다.

이야기는 항공기 추락 사고에서 시작한다. 모든 책임을 뒤집어쓴 조종사. 그리고 그의 아들 스카일러. 그는 관제사가 됐고,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집요하게 사건을 파고든다. 그런데 본인 인생은 제자리다. 비행기는 띄우는데, 자기 삶은 활주로에서 계속 대기 중이다. 결국 뉴욕 JFK 공항에서 밀려나 시골 공항으로 좌천되고 만다.

또 한 명. 바하마 섬 청년 디디가 있다. 이 친구는 여러모로 스카일러의 반대편에 놓여 있다. 밝고 가볍고 에너지 넘친다. 무전기를 잡고 섬을 들락거리는 배들의 길을 안내한다. 문제는 자격증은 고사하고 관제에 관한 기초적인 교육조차 받아본 적이 없다는 점. 한마디로 무면허 관제인데, 아직까지 사고는 없었다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다.

두 사람은 우연히 같은 주파수에서 만난다. 시작은 당연히 싸움이다. 규정 덕후 스카일러 vs 배째라 디디. FM 교관과 자유 영혼의 충돌이다. 근데 이게 또 묘하게 이어진다. 매일 밤 11시, 무전으로 이어지는 관제 수업. 스카일러는 디디에게 관제의 기술을 알려주고, 디디는 스카일러 대신 사고의 단서를 찾으러 다닌다. 얼굴 모르는 관계는 시간이 쌓일수록 점점 두꺼워진다.
사진제공 | 창작하는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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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건이 터진다. 비상착륙을 해야 하는 비행기를 스카일러 대신 디디가 지휘해야 하는 긴급상황이 발생했다. 기장의 절박한 “메이데이”가 울리는 순간부터 공연장은 난리가 난다. 조명, 음향, 영상이 한꺼번에 폭풍우처럼 몰아친다. “이거 공연 맞지?” 싶어질 정도인데, 거의 4D 체험장 느낌이다. 공연장은 비행기가 되고, 관객은 승객이 된다.

고상호의 스카일러는 건조하다. 말수가 적고 감정은 절제되어 있다. 하지만 그 속 깊은 구석엔 오래된 상처가 웅크리고 있다. 반면 정휘의 디디는 밝고 빠르고 순수하다. 탄산수 같은 캐릭터. 둘이 붙으면 매번 깨지는 소리가 나는데, 그게 또 그렇게 맛있다.

정휘는 ‘어쩌면 해피엔딩’, ‘니진스키’를 거치며 관객에게 자연스럽게 각인된 배우다. 한 번 들으면 쉽게 잊히지 않는 음색을 갖고 있는데, 이번 작품에서도 그 음색을 경험할 수 있다.
디디라는 인물은 자칫 가볍게 흘러갈 수 있다. 그런데 정휘는 그걸 그냥 두지 않는다. 밝고 경쾌하면서 의외로 단단한 면도 보여준다. 맞춤 옷을 입은 듯 자연스러운 정휘의 캐릭터 연기 덕에 스카일러의 서사가 좀 더 무게감을 얻게 됐다.

창작진도 믿음직하다. ‘니진스키’, ‘디아길레프’로 깊은 인상을 남긴 김정민 작가와 성찬경 작곡가가 다시 손을 잡았고, 여기에 ‘번지점프를 하다’, ‘베어 더 뮤지컬’을 이끈 이재준 연출까지 합류했다. 지나치기 어려운 조합이다.

고맙게도 따뜻한 엔딩이다.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간 자리에서, 사람들은 다시 숨을 고르고 한 걸음 내디딜 준비를 한다. 고상호는 “서로 다른 곳에 서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로 변화를 맞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 이야기”라고 했다.

창작산실의 기운을 업고 출발한 이 작품은 이륙부터 심상치 않다. 입소문이 빠르게 번지면서 대학로 관객들의 발걸음을 슬그머니 끌어당긴다. 초연 특유의 날것이 남아 있다. 다듬을 곳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게 또 매력이다. 또 하나의 걸작 2인극이 탄생할 것 같은 신호. 이번엔 쉽게 끊기지 않을 것 같다.
“라져”.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