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쌤김밥의 명물 톳김밥. 톳과 당근이 기분좋은 식감을 선사한다. 굵은 편이라 입이 작은 사람이라면 한 입에 넣기 힘들지 모른다.                    거제 |양형모 기자

거제 쌤김밥의 명물 톳김밥. 톳과 당근이 기분좋은 식감을 선사한다. 굵은 편이라 입이 작은 사람이라면 한 입에 넣기 힘들지 모른다. 거제 |양형모 기자



오후가 되니 거제도 지세포의 볕이 매워졌다. 산책길이 길게 느껴진다. 등에 습기가 밴다. 슬쩍 곁눈질로 보니 A씨는 늘 그렇듯, 고르고13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A씨, 꼭 이 시간에 가야 합니까? 바다 냄새보다 제 땀 냄새가 먼저 코를 찌릅니다만.”
너스레에도 A씨는 묵묵부답이다. 그의 시선은 오직 스마트폰 지도 앱의 붉은 점에 고정되어 있다.
“오후 2시 40분. 곧 브레이크 타임이 끝날 겁니다. 서둘러야 합니다.”
A씨가 보폭을 성큼 넓힌다. 입술을 굳게 다문 그의 얼굴에서 ‘반드시’라는 단어를 읽은 것 같다.

도착한 곳은 ‘쌤김밥’. 앞서 온 사람들이 식당 문 앞에 모여 있다. 잠시 후 중년의 여성이 가게에서 나와 번호표를 쥐여준다. 숫자 6이 적혀 있다. 앞에 5팀이 있다는 뜻. 이 정도라면 양호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기다림의 지루함이 증발하는 것은 아니다.

쌤김밥 외부. 보시다시피 메뉴는 톳김밥과 거미새라면, 두 개 뿐이다.     거제 |양형모 기자

쌤김밥 외부. 보시다시피 메뉴는 톳김밥과 거미새라면, 두 개 뿐이다. 거제 |양형모 기자

“이렇게까지 해서 김밥 한 줄 먹어야겠습니까? 이 정도면 고행이로군요.”
투덜거리는 나를 향해 A씨가 안경테를 밀어 올리며 입을 연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이 보증한 곳입니다. 기다림은 미식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미료죠.”

요리로 영국 유학까지(굳이!) 다녀온 양반이 김밥 앞에서 비장한 얼굴을 하고 있다.

오후 3시 정각. 마침내 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와서 기다리세요.”
직원의 안내에 따라 안으로 발을 들인다. 내부는 아담하다. 테이블은 고작 여섯 개 남짓. 그나마 네 개는 포장 손님을 위한 대기석이다. 실제로 식사를 할 수 있는 자리는 두 개뿐이다. 구석에 놓인 아기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손을 씻어도 될 정도로 작은 수족관, 벽에 다닥다닥 붙은 사진들. 정감이 가는 실내다.
“거미새라면은 포장이 안 된다는군요.” 내가 입맛을 다셨다. 이 집은 톳김밥과 거미새라면, 메뉴라고 해봐야 이렇게 둘 뿐이다. 거미새라면은 거미, 새를 넣어 끓인 것이 아니라(하하하!) 거제 미역, 새우를 넣은 라면이다. 아쉽지만, 오늘은 거미새라면을 맛볼 수 없다. 이미 식사가 가능한 두 테이블은 (당연하게도) 비어있지 않다.

A씨도 아쉬운 모양이다. 눈밑의 다크서클이 짙어졌다. 진한 해물 국물 맛을 기대했겠지만 삶은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톳김밥 네 줄을 주문했다. 한 줄에 5000원. 묵직한 비닐 봉투를 받아 들었다.

“꼭 시원한 곳에 보관하세요.”
김밥을 건네며 젊은 남자직원이 말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에 앉아 김밥을 꺼냈다. 굵기가 예사롭지 않다.
“이거 정말 대단합니다. A씨, ‘네 팔 굵다’라는 말이 생각나는군요.”
A씨는 입꼬리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 솔직히 나도 재미없는 농담이었다. A씨는 경건한 얼굴로 천천히 김밥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나도 호일 끝을 벗기고는 한 입 베어 문다.

오독오독. 경쾌한 소리가 입 안을 구른다. 식감이 맛의 70%를 지배하는 듯. 햄이나 맛살은 없다. 대신 톳과 당근이 그 자리를 빽빽하게 채웠다.

A씨가 말했다. “톳의 알긴산 성분이 입안에서 춤을 추는군요. 당근의 단맛이 바다 향을 적절히 제어합니다. 영국 유학 시절, 해초 샐러드를 자주 먹었습니다. 웨일스 사람들은 ‘라버’라는 해초를 즐겨 먹었죠. 하지만 이 톳김밥의 리드미컬한 식감에는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음식만 나오면 강의가 시작된다. 표정은 무뚝뚝하지만 목소리에 생기가 돈다. 그렇다. A씨는 지금, 기뻐하고 있다.

쌤김밥의 톳김밥은 보기보다 짜지 않았다. 오히려 담백하고 순딩순딩한 맛이다. 금방 한 줄이 사라졌다.

소화도 시킬 겸 다시 해안 데크길을 걸었다. 바다를 내려다보니 거무틔틔한 물풀들이 둥둥 떠다닌다. 이젠 저 풀의 정체를 알 수 있다. 톳이다.
“A씨, 저기 보십시오. 바다 전체가 김밥 재료로 가득합니다. 거제는 참 풍요로운 곳이네요.”
A씨가 힐끗 바다를 보더니 툭 내뱉는다.
“좀 건져 오시죠. 라면에 넣어 먹게.”

뜻밖의 농담에 실소가 터졌다. 바다, 바람, 햇살, 갈매기. 이 모든 걸 한꺼번에 둘둘 말아 싼 듯한 오후. 맛있는 거제가 입안에서 아삭, 하고 씹혔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