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진’ 역의 강필석.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히카루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김해진은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사진제공 |라이브

‘김해진’ 역의 강필석.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 히카루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다. 김해진은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캐릭터로 알려져 있다. 사진제공 |라이브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1930년대 경성의 거리에 달콤하고 치명적인 소문이 돈다. 죽은 여성작가 히카루의 소설이 출간된다는 소식에 문인들까지 술렁인다. 마침내 베일을 벗는 그의 진짜 정체. 소문이 사실이라면 신문 1면 톱기사를 장식하고도 남을, 눈이 번쩍 뜨이는 대사건이다. 무려 10년 동안 관객의 넋을 쏙 빼놓았다. 뮤지컬 ‘팬레터’의 강력한 엔진은 바로 이 지독한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이야기는 천재 소설가 김해진과 그를 동경하는 작가 지망생 정세훈, 그리고 비밀에 싸인 인물 히카루를 축으로 돌아간다. 정세훈은 일본 유학 시절부터 소설가 김해진의 열성팬이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 ‘히카루’라는 필명으로 해진에게 팬레터를 보낸다. ‘선생이시여, 슬픔을 안고 계시나이까? 그렇다면 그 슬픔을 나누어 주소서’라는 문장에 해진의 마음은 내려앉고 만다.

히카루를 위해 세상과  접촉을 끊고 집필실에 처박혀 마지막 생명을 불사르며 소설을 쓰고 있는 김해진(오른쪽).  사진제공 |라이브

히카루를 위해 세상과 접촉을 끊고 집필실에 처박혀 마지막 생명을 불사르며 소설을 쓰고 있는 김해진(오른쪽). 사진제공 |라이브

외로움과 폐병에 시달리던 천재 작가에게 이름도 모르는 여인의 편지는 구원이자 유혹이었다. 해진은 편지 속 히카루를 ‘생의 반려’라 부르며 사랑에 빠진다. 작품 속 문인 단체인 ‘칠인회’는 실제 문인 모임 ‘구인회’를 모델로 삼았다. 세훈은 칠인회의 급사로 일하언 중 새 멤버로 영입된 해진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이 보낸 편지 때문에 행복해하는 해진을 보며 괴로워하지만, 세훈은 정체를 밝힐 기회를 놓치고 거짓을 키워나간다.

히카루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훈의 결핍을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세훈은 친일파 아버지,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환경에서 자존감을 거세당한 소년이다.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공포를 느끼던 그는 세상에 드러내지 못한 야망과 야성을 담아 히카루를 창조했다.

‘김해진’ 역의 이규형.     사진제공 |라이브

‘김해진’ 역의 이규형. 사진제공 |라이브


‘김해진’ 역의 이규형. 사진제공 |라이브

‘김해진’ 역의 이규형. 사진제공 |라이브


심리학적으로 히카루는 세훈의 ‘쉐도우’이자 ‘이드(Id)’에 해당한다. 자아가 수치스럽거나 위험하다고 판단해 숨겨둔 성질들이 히카루라는 인격으로 형상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 결과, 순종적이고 나약한 소년 세훈과 달리 히카루는 도발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으로 태어났다. 히카루는 고정된 인격체가 아니라 세훈과 해진의 심리 상태에 반응하며 상호작용하는 에너지다.

세훈이 주저할 때 히카루는 잔인해지고, 해진이 열망할 때 히카루는 눈부시게 아름다워진다. 그는 두 남자가 가진 결핍을 비추는 거울인 동시에 그들을 통제하는 권력으로 자라난다. 해진은 왜 이 환상에 그토록 집착했을까. 폐결핵이라는 죽음의 그림자를 늘 곁에 둔 해진에게 히카루는 불멸의 예술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세훈(왼쪽·문태유)이 칠인회의 멤버 이윤으로부터 투서에 대해 추궁받는 장면.            사진제공 |라이브

세훈(왼쪽·문태유)이 칠인회의 멤버 이윤으로부터 투서에 대해 추궁받는 장면. 사진제공 |라이브

해진은 자신의 병약함을 상쇄해 줄 강렬한 영혼을 갈구했고 히카루의 편지는 그 갈증을 완벽히 해소해 주었다. 해진은 “그게 누구라도, 편지의 주인을 나는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매달린다. 해진이 무의식적으로나마 히카루의 정체를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부정하기 어렵다. 칠인회 멤버들이 히카루의 정체를 의심할 때 격렬하게 방어한 행동은 환상이 깨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진실에 무지한 것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생명줄인 환상을 ‘알지 않기로’ 선택한 것이다. 히카루와 세훈이 거울을 보듯 같은 동작을 하며 춤을 추는 순간들은 두 정체성이 섞여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훈은 ‘난 거짓말이 아니야’라고 외치며 스스로 히카루가 되어버린다.

히카루는 세훈에게 글을 쓰는 동력이자 유일한 친구였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해진이 가짜 자아로 인해 죽어가는 것을 목격하며, 비극을 멈추기 위해 자신의 일부를 잘라내기로 결심한다. 세훈은 해진을 향한 사랑을 위해 히카루라는 환상을 스스로 거두어들인다. 이는 미성숙했던 소년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대면하며 어른으로 나아가는 가혹한 의례다. 세훈이 히카루를 떠나 보내는 과정은 자해에 가깝게 그려진다.

‘히카루’ 역의 강혜인. ‘인생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히카루라는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사진제공 |라이브

‘히카루’ 역의 강혜인. ‘인생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히카루라는 캐릭터를 잘 표현했다. 사진제공 |라이브

결국 해진은 세훈의 고백을 통해 진실을 알게 되지만 끝내 히카루를 버리지 못한다. 히카루는 세훈의 거짓말이기 이전에 해진 자신의 영혼이 낳은 ‘최후의 문장’이었기 때문이다. 해진은 (진실을 알게 된) 히카루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에 ‘너의 말들로 버티었다’는 글을 남기며 평생 죄책감을 가질 세훈을 포용한다.

이번 앵콜 시즌의 출연진은, 지난 10년 간 늘 그래왔듯, 연기 장인들로 짜였다. 김해진 역에 강필석, 김재범, 김경수, 김종구, 이규형이 이름을 올렸다. 정세훈 역에는 문태유, 문성일, 윤소호, 홍기범이 무대에 오른다. 소정화, 강혜인, 이봄소리, 허윤슬은 그야말로 ‘4인 4색 4미’의 히카루를 보여준다.

치명적인 소문으로 시작해 서글픈 고백으로 끝을 맺는다. 가짜가 진짜가 되고, 그 진짜 때문에 영혼이 구원받는 기적. 해진에게는 히카루가, 세훈에게는 해진이 그랬던 것처럼, 당신의 지독한 하루를 버티게 만들어 준 최후의 문장은 지금 어디쯤 도착해 있을까.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