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28일 세상에 창단소식을 전한 서울클래식앙상블. 사진제공 서울클래식음악협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좋은 음악을 들으면 귀와 마음이 부르다. 5월 28일 밤, 서울 일신홀에서 모처럼 기분 좋은 포만감을 만났다. 사단법인 서울클래식음악협회 산하 서울클래식앙상블의 창단연주회 무대다.
첫 무대치고 참 능청스럽다. 창단 무대라고 하면 연주자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경우가 흔한데, 이 앙상블은 지난주에 큰 공연 하나 마치고 온 사람들 같다. 무대 위에는 여유가 넘쳤고 단원들의 호흡은 유연했다.
이들의 뜻깊은 출발은 사단법인 서울클래식음악협회가 공고하게 쌓아올린 실내악 기획 공연 시리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동안 협회는 공모를 통해 역량 있는 실내악 팀들을 발굴해 적극적으로 연주 기회를 제공해 왔다.
조윤서 서울클래식음악협회 회장은 “2022년부터 실내악 시리즈를 진행하며 꾸준히 신진 음악가를 발굴해 무대를 제공해 왔다. 이번엔 일회성 공모 지원으로 끝내기보다 단체 고유의 독창적인 예술적 색채를 확립하고 싶었다”라고 창단 배경을 밝혔다.
연주자가 원하는, 깊이 있는 음악적 표현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는 자체 연주 단체를 만들자는 의기투합이 시작됐다. 차근차근 내실을 다지며 기획해 온 결실은 마침내 이날 무대 위에서 눈부신 꽃을 피웠다. 조 회장은 “서울클래식앙상블을 창단하게 되어 감회가 무척 깊다”라고 기쁜 얼굴을 했다.
평균 연령 30대 중반의 음악가들로 구성된 이 앙상블은 젊고 단단한 결합력을 자랑한다. 단체를 총괄하는 박재연 단장과 음악감독을 맡은 바이올리니스트 안은주를 축으로 긴밀한 음악적 교감을 나눠온 단원들이 모였다. 특히 학창 시절부터 오랜 인연을 이어온 선후배들이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한뜻으로 뭉쳐 서울클래식앙상블만의 개성을 완성했다.

서울클래식앙상블의 연주모습. 사진제공 서울클래식음악협회
안 감독은 “미국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앙상블 활동을 경험했고, 귀국하면 한국적인 선율과 정서를 담은 연주단체를 꼭 만들어보고 싶었다”라며 “연주를 센스 있게 잘하고 실내악에 특화된 연주자들을 만나 내가 원하는 구성을 함께 실현하게 되어 기쁘다”라고 감회를 전했다.
본격적인 연주가 시작되기 전에 무대에 오른 박재연 단장은 가정의 달 5월을 언급하며 객석을 향해 머리 숙여 감사를 건넸다. 박 단장은 “오늘 이 자리는 새로운 단체의 출범을 화려하게 알리는 과시의 장이 아니라, 그동안 저희의 시작을 믿고 응원해 주신 모든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박 단장은 또 “앙상블은 동료와 가족, 스승과 선배뿐만 아니라 그 음악에 귀 기울여 주는 관객이 있을 때 비로소 하나의 울림이 완성된다”라고 했다. 음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마음을 이어주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는 서울클래식앙상블의 예술적 철학이 포근하게 공연장 구석구석까지 스몄다.
이번 연주회의 티켓 수익금 일부는 저소득층 가정 아동의 지속적인 음악 교육을 위해 기부한다. 이는 서울클래식앙상블의 명예고문인 배일환 교수(이화여대 관현악과)의 공동체 정신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조윤서 회장은 “배일환 교수님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많이 베풀고 나누며, 음악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만들고자 했다”라고 기부 취지를 밝혔다.
첫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이은영 작곡가의 ‘wu-ri-no-rae(우리노래)’는 이 신생 앙상블이 장착한 기민한 음악적 감각과 당찬 의욕을 가감 없이 보여준 완벽한 한국 초연 무대였다. 예술감독이자 악장, 지휘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 낸 안은주의 리드가 돋보였다.
서울클래식앙상블은 전통 민요의 멋을 현대적인 음향적 감각으로 세련되게 풀어냈는데, 마치 눈앞에 거대한 음악적 병풍이 펼쳐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안은주 감독에 대한 단원들의 굳건한 신뢰가 사운드에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안 감독은 “오늘 창단 연주는 서울클래식앙상블만의 색을 만들어가는 첫걸음이니만큼 초연 작품들로 채웠다. 창작과 재해석, 전통과 현대, 익숙함과 새로움이 하나의 무대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드리고 싶었다”라고 곡의 의도를 설명했다. 이어 “현악 앙상블로 한국적인 멜로디를 풀어낼 때 우리의 음악이 글로벌 무대에서도 충분히 설득력을 가지리라 믿는다”라고 포부를 전했다.

해금연주자 권새별과 서울클래식앙상블. 사진제공 서울클래식음악협회
제목이 내포한 소멸과 잊혀짐이라는 가볍지 않은 주제가 해금의 애달프고 인간적인 음색과 만나면서 서양 악기 연주에서는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차원의 우수를 자아냈다. 동서양 현악기가 가진 고유의 주법과 소리가 절묘하게 교차하고 화합하며 빚어내는 소리는 객석을 짙은 우취(憂趣)와 서정으로 적셨다.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 제8번은 이 플렉서블한 앙상블이 왜 유닛 연주 방식을 자신들의 강력한 무기로 내세우는지를 증명한 무대였다. 무대를 가득 채웠던 단원들이 잠시 물러나고 바이올린 조정민과 김도혜, 비올라 이예림, 첼로 양채원 단 4명의 연주자만이 무대에 올라 작곡가의 강렬하고도 내밀한 고백을 풀어나갔다.
한 달 남짓한 짧은 연습 기간이 무색할 정도로 4명의 연주자는 곡 전체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긴장감과 전쟁의 공포를 연상시키는 격렬한 리듬을 생생하게 묘사했다. 안은주 감독은 “이 곡은 연주자들이면 어디선가는 다 해봤을 아카데믹한 곡이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라며 “각자 활동하던 연주자들이 다시 뭉쳐 우리끼리 연주했을 때 서로에게 깊은 공부의 시간이 될 것이라 생각해 프로그램에 포함했다”라고 했다.
인터미션 이후 2부 첫 곡은 윌리엄 그랜트 스틸의 ‘마더 앤 차일드’. 역시 서울클래식앙상블이 이번 연주회를 위해 야심 차게 준비한 두 번째 한국 초연 작품이었다. 창단연주회라는 단 한 번뿐인 상징적인 무대에서 초연곡을 무려 두 작품이나 프로그램에 배치했다는 사실 자체가 젊은 현악 앙상블다운 과감한 도전 정신과 진취적인 의욕을 대변한다.
어머니와 아이의 온화하고 평온한 사랑을 그린 이 곡에서 앙상블은 한없이 부드럽고 다정한 음색을 선보였다. 따뜻한 온기가 객석을 감싸 안았고, 절제된 아름다움을 뚫고 배어 나온 선율이 청중의 지친 마음을 매만졌다.
안 감독은 “5월 가정의 달에 딱 맞는 따뜻하고 가정적인 곡이라 일부러 프로그램에 넣었다. 작곡가의 넓은 스펙트럼 중 현악을 위한 곡은 이 작품이 유일한데, 청중에게 조금 낯설거나 난해할 수 있어도 창단 무대에서 선보이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덧붙였다.

왼쪽부터 조윤서 서울클래식음악협회 회장, 안은주 서울클래식음악협회 음악감독, 박재연 서울클래식앙상블 단장. 양형모 기자
관객의 멈추지 않는 박수와 환호에 화답하며 선보인 마지막 앙코르곡은 칼 젠킨스의 ‘현을 위한 콘체르토 그로소 팔라디오’. 이날 전체 프로그램 중에서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고 널리 알려진 곡일 것이다. 서울클래식앙상블은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완벽한 호흡의 일체감을 보여줬다.
첫 번째 애피타이저부터 달콤한 마지막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동선과 깊은 정성으로 차려진 최고급 만찬코스를 대접받은 기분이다. 서울클래식앙상블이 선사한 첫 번째 무대는 한 편의 완벽한 예술적 식탁이었다. 마음을 담아 찬사와 응원을 보낸다. 아주 잘 먹었습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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