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워’에서 최고의 소방관 강영기로 분한 배우 설경구. 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지난 20년간 참 많이도 싸웠다. ‘공공의 적’에선 강력반 형사로 범인과 싸웠고 ‘실미도’에선 살기 위해 죽도록 싸웠다. ‘역도산’은 몸무게와 전쟁을 벌였고 ‘해운대’에선 물과의 사투를 벌였다.
늘 죽도록 고생만 하는 영화에 출연하느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요즘 영화들은 다 그렇더라고”라며 피식 웃는다.
영화 ‘타워’(감독: 김지훈, 제작: 더타워픽쳐스)에서 카리스마와 투철한 사명감과 강한 리더십을 자랑하는 최고의 소방관 강영기 역을 맡은 배우 설경구(45)를 만났다.
인터뷰 당일,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설경구는 아침 일찍 병원에 다녀왔다. 그렇지만 인터뷰가 시작되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분위기를 이끌었다.
▶ “내가 고생했다고 하니, 무안하고 부끄러워”
- 고생이 많았다고 들었다. 물과 싸우고, 불과 싸우고…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엄청 고생했다고 하니 무안하다. 소방관들의 고충을 표현하려 했지만 어떻게 실제 상황과 같을 수 있나. 우리는 안전장치도 하고 컷 사인이 나면 쉴 수도 있는데 그분들은 정말 사투를 벌이지 않나. 기사로 그런 말이 나가니까 부끄럽더라.”
- 그렇다고 하더라도 힘들었을 것 같다.
“물론 그랬다. 그런데 액션이 많아 힘든 게 아니라 유독가스 때문에 힘들었다. 보통 화재사고가 나면 유독가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고 한다. 우리도 세트장 안에서 찍다보니 가스 나갈 곳이 없어 참 힘들었다. 호흡도 가쁘니까 유독가스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랬더니 두통이 생기더라.”
- 시나리오만 봐도 힘들다는 걸 알았을 텐데, 이 영화를 고집한 이유가 있나.
“‘열혈남아’를 찍을 때, 김지훈 감독이 충남 강경으로 나를 찾아왔는데 못 만났다. 그래서 미안한 마음에 따로 시간을 내 만나게 됐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화려한 휴가’ 막바지 촬영 때 제작비가 떨어져 돈을 구하러 다닌 이야기를 들었다. 아직도 이런 현실이라니…. 아무튼, 김지훈 감독이 ‘영화 촬영 때 배우를 어떻게 웃길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그게 참 재밌더라. 그렇게 말하는 감독은 처음 봤다.”
- 제작보고회 때, 손예진을 캐스팅하기 힘들었다고 말했다.
“처음에 (손)예진이의 분량이 진짜 적었다. 그런데 김지훈 감독이 예진이한테 이 시나리오를 주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너 미쳤냐, 예진이가 한대?’라고 핀잔을 줬다. 게다가 감독이 손예진 소속사 대표와 만나는 자리를 만들며 나에게 지원사격을 해달라고 하더라. 그래서 함께 소속사 대표를 설득시켜 우리 영화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한번도 예진이에게 뭘 하라고 시킨 적이 없는 대표님이 처음으로 이 작품을 시켰다고 하더라.”
- 촬영장은 늘 즐거웠다고.
“놀긴 참 좋았다. 술도 많이 마시고…. 그런 소모임이 없었더라면 무슨 재미로 영화를 찍었을지 모르겠다. 영화이야기를 하면서 재촬영할 부분도 말하고 그랬다. 예진이는 이번 영화를 찍으며 주량이 늘었다.”
-여배우들 주량을 늘리는 비법이 있나.
“그런 비법은 없다.(웃음)”
배우 설경구. 동아닷컴 국경원 기자 onecut@donga.com
▶ “손예진, 여성미에 털털함까지 갖춘 최고의 여배우”
- 한효주와 ‘감시’를 찍고 있다.
“그렇다. 효주가 정우성을 보고 반했다. 전에 지하철역에서 셋이 같이 촬영을 한 적이 있는데 정우성을 보고는 ‘진짜 배우같다’고 하더라. 그래서 ‘그럼 나는?’이라고 물어보니 ‘선배님은 그냥 사람 같아요’라고 대답하더라.(웃음)”
- 섭섭했나.
“아니, 정우성이 좀 멋지긴 하다. 잘생겼고 부드러운 성격에 매너도 좋다. 게다가 앉아있지도 않는다. 멋있는 코트를 입고 늘 서 있다.”
- 그렇다면, ‘타워’의 손예진과 ‘감시’의 한효주의 매력을 비교하자면.
“한효주는 ‘감시’에 나오니까 다음으로 미루겠다.(웃음). 예진이의 매력은 말해야지. 손예진은 여성미와 털털함을 함께 갖고 있다. 손예진이 영화 촬영을 하는 동안 일당백을 했다. 대단한 배우다.”
- 어떻게 일당백을 했나.
“손예진은 굉장히 긍정적이고 재밌다. 그 추운 새벽에 물고 싸우는데도 아무런 말도 안했다. 오히려 ‘오늘 소풍가는 날이네’라고 하더라. 긴장을 풀려고 그랬던 건지 모르겠지만 동료배우들에게 많은 힘이 됐다.”
- 이렇게 즐겁고 힘들게 찍었는데, 잘 됐으면 좋겠다.
“그러게. 잘 됐으면 좋겠다. 하지만 내 의지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관객들의 판단에 맡길 차례다.”
- 혹시, 공약을 걸고 싶진 않은가.
“공약은 무슨. 높은 분들이 세운 공약 지켜지는 것 못 봤는데(웃음) 나까지 거들고 싶진 않다.”
▶“벌써 20년이나 됐다고? 에고…나도 많이 늙었네”
-연기 생활한 지 20년이 됐다.
“나도 몰랐네. 대학교 4학년 가을부터 대학로에 포스터 붙이며 연극했으니까 20년이 맞네. 그 때 다른 연극배우들은 연봉이 10만원~20만 원 될까 말까였는데 나는 월급으로 50만 원을 받고 다녔다. ‘라이어’라는 연극을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달은 80만원까지 받았다. 그러고 나서 건방지게도 프리선언을 했다. 그러니 날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포스터를 붙이며 살아야 했다. 아마 내가 배우가 안됐다면 포스터업체 사장이 됐을 거다. (웃음)”
- 그럼 연기생활은 어떻게 이어 갔나.
“김미경 선생님께서 한 선배에게 ‘쟤 성실하게 보인다. 데리고 와 봐’라고 하셔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거다. 부모님이 엄청 뭐라고 하셨다.”
- 아들이 배우가 된다고 하니 싫어하셨나.
“처음엔 집안이 난리가 났다. 그러다가 금방 싫증을 내는 내 성격을 아시는 부모님은 ‘2,3년 하다가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하셨나보다. 그런데 내가 계속하고 있으니 신기하셨는지 그냥 하게 하시더라. 그게 벌써 20년이 된 거다.”
- 연극무대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솔직히 두렵다. 내 눈앞에 늘 카메라였는데 관객들이 있다면 가슴이 엄청 두근거릴 것 같다. 전에 ‘지하철 1호선’이 독일에서 공연을 한다는 기념으로 서울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 때 가슴이 정말 두근두근 거렸다. 눈이 마주칠까봐 걱정했다.”
- ‘타워’를 찾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그냥 ‘타워’를 보러 와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배우가 관객에게 더 바랄 것이 있겠나.”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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