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촉한클래식]비장한‘비창’하모니,비운의‘태안’비추다

입력 2008-05-0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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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심포니내한공연
늙은 독수리를 연상케 하는 은발의 노지휘자가 무대를 가로질러 지휘대에 서자 일순 강렬한 침묵이 공연장을 휘감았다. 이윽고 독수리의 긴 날개가 천천히 움직이고, 현과 관이 기다렸다는 듯 서늘한 음색을 뿌려대기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과 함께 러시아 양대 교향악단으로 꼽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 태안 피해주민을 돕기 위한 사랑의 콘서트장은 입추의 여지없는 관객들로 가득 찼고, 사랑의 하모니가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을 울렸다. 쇼스타코비치의 축전서곡으로 열린 문을 통해 한국이 낳은 첼로의 명장 정명화가 미소와 함께 걸어 들어왔다. 두 번째 곡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이어서 때로 평론가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주제에 의한 변주곡’. 정명화는 성숙한 여인과 아이의 천진난만함을 담은 다양한 표정을 현 위에 고스란히 얹었다. 듣는 이의 심금을 흔들어대는 저음의 굵은 보잉과 세련된 고음처리, 현란한 비브라토는 ‘노래하는 악기’ 첼로의 목소리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공연의 2부는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너무나도 익숙한 ‘비창’이 연주됐다. 태안의 슬픔을 더욱 큰 슬픔으로 안으려는 지휘자 알렉산더 드미트리예프의 마음이 느껴졌다. 러시아 악단에게 있어 차이코프스키는 교과서이자 바이블이다.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을 차이코프스키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지휘자와 단원들은 1악장에서부터 종장의 거대한 슬픔을 향해 일직선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드미트리예프의 손으로 다듬어진 거칠면서도 민활하게 움직이는 현, 명쾌하게 울리는 목관, 힘 가운데 슬라브의 감성을 감춘 금관이 뒤섞이며 작곡자의 고뇌와 비감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음악의 슬픈 바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심포니가 들려준 비창은 서늘하게 푸른 음의 바다 속에서 저녁 무렵의 하늘을 올려다보는 듯한 느낌을 선사했다. 제정 러시아 궁정의 무도회를 떠올리게 하는 2악장이 끝나고, 드디어 알레그로 몰토 비바체의 3악장에서 슬픔은 커다란 회오리가 되어 무대를 거칠게 휘감았다.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리면서도 숨이 가빠지지 않는다. 결국 관객들은 ‘악장과 악장 사이에는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공연장의 불문율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3악장 후 지휘자는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의 지휘봉이 움직이자 음악은 4악장의 황량한 세계로 발을 내딛는다. 태안의 슬픔은 세상의 모든 슬픔이 되어 공연장 위를 떠돌았다. 이윽고 슬픔은 조금씩 지워져가고, 러시아 설원의 풍경을 닮은 순백색의 음만이 관객들의 가슴을 후벼 팠다. 바이올린이 둥글게 말린 눈물을 흘리면 첼로의 거친 손등이 눈물을 닦았고, 관객들은 슬픔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정신없이 오케스트라가 그려낸 순백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3번째 앵콜곡에서 지휘자 드미트리예프는 흰색 두루마기를 걸치고 나와 ‘그리운 금강산’을 연주했다. 관객들은 하나 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화답했다. 기사를 메모하던 기자도 일어섰다. 슬픔이 감동과 환희로 물결쳤다. 두 손이 부어라 박수를 치면서 문득 이 오케스트라가 좋아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 이런 멋진 오케스트라를,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차이코프스키 ‘비창’ 명반들 수많은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가운데 최고의 음반은 무엇일까. 기자가 추천하는 비창의 명반 4장은 다음과 같다. □ 1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지휘)-레닌그라드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82년|ERATO|스테레오 ‘러시아 교향악의 영원한 교과서’ 예프게니 므라빈스키와 상트페테르부르크필하모닉의 전신 레닌그라드필의 만남은 가히 차이코프스키 음악을 위한 최상의 조합이 아닐 수 없다. □ 2 페렌츠 프리차이(지휘)-바이에른방송교향악단 1960년|ORFEO|모노 프리차이 스스로 연주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자칫 사라질 뻔했던 위기의 명반. 한없이 슬프지만 신파로 흐르지 않는 프리차이의 절제된 감성이 최고다. □ 3 레오나드 번스타인(지휘)-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986년|DG|스테레오 번스타인 ‘느림’의 미학이 만개한 명연. 느리디 느린 4악장은 지금까지도 논란이 되고 있다. 번스타인은 긴 호흡 속에 진한 슬픔의 감성을 한 줄기 눈물처럼 흘린다. □ 4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지휘)-NBC심포니오케스트라 1938년|NAXOS|모노 개인적으로 기자가 추천하는 필청반. 토스카니니의 가공할 박력이 전 악장을 완벽히 지배한다. 토스카니니사운드의 정점. 3악장이 끝난 후 마치 록공연장을 방불케 하는 관객의 환호성과 박력이 쏟아진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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