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 커야 金을 딴다 ‘멘털(Mental·정신)을 잡는 자 금메달을 거머쥐리라.’ 한국 레슬링의 간판 A 선수는 연습 땐 B 선수를 압도한다. 그런데 대회만 나가면 금메달은 B 선수의 몫이다. 실력은 A 선수가 월등한데 메달은 B 선수의 몫이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스포츠 현장에서 흔히 ‘연습용 선수’라는 말이 있다. 연습 때는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다가 정작 큰 경기에 나가면 기대 이하의 플레이로 무너지는 선수를 일컫는다. 세계 최고의 고수들이 모이는 올림픽의 각 종목에서는 실력보다는 정신력 싸움에서 승패가 갈리는 경우가 많다. 특히 기술 수준이 비슷할 땐 정신 상태에 따라 몸의 컨디션이 달라진다. 속칭 ‘얼었다’면 실력 발휘를 하지 못한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은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은메달이나 동메달로 바뀌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태릉선수촌과 협력해 금메달 가능권 선수 ‘정신력 기르기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다.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대표선수들의 심리 상태를 분석해 보강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하는 것이다. 스포츠과학과 정보화의 시대를 맞아 메달급 선수들의 경기력에선 별 차이 없지만 심리적 능력에선 큰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실전서 긴장은 곧 패배… 선수마다 맞춤식 관리 경기에 나서면 선수는 부담을 가지고 긴장하게 마련. 긴장의 정도가 강하냐 약하냐에 따라 경기력이 달라진다. 관심이 집중되는 경기에선 그 강도가 엄청나다. 이때 심리적인 불안 상태가 생기는데 이를 ‘경기불안’이라고 한다. 경기불안이 크면 집중이 안 되고 승리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돼 결국 패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연구원 스포츠심리팀(김병현 김용승 신정택 박사)은 대표팀 19개 종목 455명을 대상으로 대표선수들 심리상태 기준표를 만들어 경기 불안 수준을 체크해 유형별로 분리했다. 크게는 불안을 잘 조절하는 집단과 그렇지 못한 집단 2종류. 연구원의 관심은 후자. 메달권에 있으면서도 불안을 조절하지 못해 경기를 망치는 선수들을 집중 관리하며 ‘간’을 키우고 있다. ○금메달 영상 보여주고 “난 할수 있다” 반복 남자 유도 60kg급 최민호(28·KRA)는 첫판 징크스가 있었다. 이상하리만치 첫판이나 두 번째 판까지 헤매다 그 이후 한판승을 거두는 일이 많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때도 이 때문에 동메달에 머물렀다. 연구원 연구 결과 최민호는 초반 경기를 한 뒤에 자신감을 찾았다. 금메달을 따려면 플레이의 항상성이 있어야 하는 법. 그래서 신정택 박사는 최민호에게 늘 “할 수 있다”는 혼잣말을 하는 습관을 들이게 하고 주위에서도 “넌 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하도록 했다. 그리고 2003 세계선수권 때 승승장구하며 금메달을 따냈던 장면을 영상으로 보여 주었다. 그러자 달라졌다. 첫판에 나설 때 과거와 같이 지나친 긴장을 하지 않고 자신감이 넘쳤다. 2007 세계선수권대회에서는 아깝게 동메달에 그쳤지만 최민호 자신을 포함해 지도자들은 “금메달 0순위”로 생각하고 있다. ○부정적 생각 차단… 경기 집중하게 심리 훈련 루틴(Routine)은 일상적 생활이나 훈련, 경기 날 똑같은 행동을 하며 불안이 끼어들 틈을 줄여 주는 것이다. 최민호의 사례에서 보듯 ‘좋은 말 듣기’나 ‘성공적인 영상물 시청’도 루틴의 일종이다. 신정택 박사는 “올림픽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내려면 경기가 주는 내적(심리적) 외적(주변 환경적)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경기에만 집중하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루틴이 아주 유용하다”고 말했다. 심적 부담이 커지면 ‘금메달 못 따면 어떡하지’ ‘혹시 예선 탈락하는 것 아냐’ ‘저 상대가 나보다 강한 것 같은데’ 등 부정적인 생각이 든다. 루틴은 일상생활 루틴, 경기 당일 루틴, 경기 전후 루틴 등으로 나뉘는데 매일 반복해 무의식적으로 따라 하도록 해 부정적인 생각 자체를 못하도록 만든다. 수영에서 출발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선수가 MP3플레이어로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혼자만의 세계에 빠지는 것도 경기에만 집중하려는 루틴이다. 연구원은 양궁 사격 유도 태권도 배드민턴 펜싱 수영 등 메달 가능 종목의 ‘간’ 작은 선수들을 대상으로 개별 ‘금메달 루틴’을 만들어 시행하고 있다. 양종구 기자 yjongk@donga.com ■선수들이 자주 쓰는 혼잣말 ·나는 나를 믿는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금메달을 가져 오는 일만 남았다. ·떨지 마라. 나는 할 수 있다. ·드디어 내게 기회가 왔다. 아자! ·태릉에서 훈련한 대로만 하면 금메달이다. ·×××, 넌 할 수 있어. 널 믿는다. ·여기서 내 모든 걸 보여 주겠다. 이에리사 태릉선수촌장 “엘리트 체육이 한국 스포츠 미래… 베이징 깜짝 성적 기대” “유럽이나 미국이라면 한국 중국 일본이 같은 조건이지만 베이징은 우리에게 불리하다. 한국과 중국이 메달을 놓고 맞붙을 종목이 많은데 중국이 200% 유리할 것이다.” 2005년 4월 여성으로선 처음 태릉선수촌장이 돼 화제를 모았던 이에리사(53·사진) 촌장은 최근 다시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선수촌 내 여자 숙소가 부족해 리모델링 신청을 했지만 문화재청이 허가를 내주지 않자 코칭스태프, 대표 선수 등 200여 명과 함께 대전 문화재청 앞에서 운동복 차림으로 스크럼을 짜고 시위를 벌여 그날로 허가를 받았다. “추운 날 우리 때문에 고생하는 경찰 아저씨들을 보면서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상식에 어긋난 방침을 묵과할 수는 없었다. 문화재청에서는 자꾸 태릉선수촌을 비우라는데 한국 스포츠의 영광을 함께한 이곳이야말로 진정한 문화재 아닌가.” 이 촌장은 태릉에 와서 ‘싸움닭’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훈련비를 더 얻어내기 위해 싸웠다. 3년마다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용 허가를 받던 관행을 깨뜨리기 위해 앞장섰다. 그런 그에게 1973년 유고 사라예보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여자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 우승을 이끌어 낼 때의 기백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최근 체육계에서는 국제대회 성적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엘리트 체육보다 생활 체육을 활성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하지만 이 촌장의 생각은 달랐다. “생활 체육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돈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정부는 체육관 등 기반 시설 확충에만 신경 쓰면 된다. 엘리트 체육이야말로 국가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육성해야 한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 역시 엘리트 체육을 더욱 강화하는 추세다. 엘리트 체육을 육성하지 않으면 한국 스포츠의 미래는 없다”며 “베이징에서는 금메달 10∼12개를 따내 톱10에 드는 것이 목표다. 깜짝 놀랄 만한 종목에서 좋은 성과가 나올 수도 있다. 선수들이 편안하게 훈련할 수 있도록 최대한 지원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말했다. 이승건 기자 w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