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빠른외야수들의빛과그림자

입력 2008-05-24 09:35: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루수 4명 외야수 4명 포수 2명 1위부터 10위까지 프로야구의 역대 홈런 랭킹을 따져보면 1루수만큼이나 많은 홈런타자들이 외야에 포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1루수보다는 훨씬 많은 수비 범위를 책임지고 있지만, 비교적 수비 부담이 적은 코너 외야 자리는 거포들이 선호하는 포지션 중 하나였다. 비록 빠른 발은 없어서 호수비와는 거리가 멀지만 이를 대신 강한 어깨로 만회하는 그들이었으니 홈런의 매력에 푹 빠지던 시절에는 코너 외야수의 수비가 약한 것이 팬들의 눈에 큰 문제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요즘의 프로야구는 어떠한가? 이제 코너 외야수들도 공격보다 수비에서 각광을 받는 시대가 찾아왔다. 8개 구단 중 가장 막강한 외야 라인을 자랑하는 두산이 지난해 김현수-이종욱-민병헌의 라인으로 준우승을 차지했고, 우승팀 SK의 이진영은 WBC를 통해 ′국민 우익수′라는 호칭을 얻었지만 정작 팀에서는 그 수비 때문에 잘 치고도 경기 막판 대수비로 교체되는 일이 허다했다. 롯데의 로이스터 감독도 인터뷰를 통해 한국 외야수들의 가장 큰 특징으로 빠른 발을 꼽았고, 그러면서 송구능력이 뛰어난 것이 미국 야구와의 차이점이라고 말했다. 파워 있는 선수가 한 번의 공격 찬스에서 3,4점을 뽑아준다면, 발 빠른 외야수 역시 한 번의 수비로 3,4점을 충분히 막아낸다. 그런 점에서 WBC는 코칭 스테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모든 야구팬들의 외야수를 바라보는 시각을 한 번에 바꿔버렸다. 이제 팬들은 적절한 타이밍에 안타를 쳐내는 것보다 부적절한 타이밍에 장타를 허용하는 것에 더 민감하다. 이렇듯 팬들은 수비를 잘하는 외야수를 원하고 감독들도 더 이상 코너 외야수를 ′수비보다 공격우선′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해 홈런왕을 차지했던 심정수가 실망스런 4번 타자, 낙제점 외야 수비로 2군에 내려간 것을 비롯해 올 시즌 홈런 랭킹을 살펴보면 박재홍이 23일 경기에서 홈런을 추가해 7개로 간신히 Top 10안에 들어 겨우 체면치례를 하고 있고, 그 뒤를 우리 히어로즈의 송지만과 부상 중인 이택근이 5개로 잇고 있을 뿐이다. 반대로 도루 부문에는 1위부터 5위까지 고영민을 제외한 4명 모두가 외야수이다. 민병헌, 조동화, 박재상은 주 포지션이 지금까지 발 느린 선수들이 장악했던 코너 외야수임에도 불구하고 Top 10안에 올라 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부각된 ‘한 베이스를 더 가는 야구’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타구를 치고도 1루타를 2루타로, 3루에 멈출 선수가 홈으로 들어오는 ‘친발야구’가 큰 이슈가 된 만큼 반대로 수비에서는 한 베이스를 덜 주는 야구를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결국 이런 것들이 자연스럽게 흐르면서 수비력 좋은 발 빠른 외야수들이 몰려오는 계기를 만든 셈이다. 내야 포지션에 대한 새로운 관점도 이러한 변화를 불러왔다. 현대의 톰 퀸란이 오기 전인 1990년대만 하더라도 국내에서 3루 라인을 타는 공을 잡아내는 것은 2루타를 단타로 막아냈다는 것 자체만으로 칭찬을 받았던 게 사실. 당시는 그 공을 1루에 노바운드로 던져 아웃시키는 일은 메이저리그에서나 볼 수 있는 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웨이트 트레이닝의 보급과 서구적인 체형의 선수들이 점점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3루수의 자리가 순발력이 빠르고 그나마 어깨가 좋은 수비수들이 위치하던 수비형 포지션에서 이제는 강한 어깨는 물론 덩치와 파워를 가진 선수들이 나서는 공격형 포지션으로 바뀌었고, 김동주, 이범호, 최 정, 최근에는 이대호까지 등장해 스타들의 집결지로 탈바꿈 시켰다. 타자 용병을 쓰는 팀들의 경우 그들을 중심 타선에 두면서 한 명의 국산 거포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게 된 것도 한 원인이다. 용병 선수에 1루수, 3루수의 클린업이 구성된다면 굳이 코너 외야수에 또 다른 공격형 타자를 포진시킬 필요가 없어진다. 파워가 있어야만 어깨가 강하다는 과거의 공식이 깨진 것도 이런 일을 불러왔다. 민병헌과 김강민은 단 한 번도 5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낸 적이 없는 단거리 타자지만 그들의 어깨가 전성기 시절 심정수나 심재학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물론 흐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 그 변화 역시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홈런 타자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아쉽지만 팬들은 그 대신 호수비로 보장받고, 누구도 어려운 타구를 열심히 쫓아가 잡아내는 모습이 그저 야구 진기명기의 눈요깃거리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모든 팀들에서 이런 현상이 일률적으로 벌어지고 있다는 점은 다양화의 측면에서 문제가 될 만한 일이다. 실제로 당장 오는 8월 베이징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나가야 할 국가대표 외야수인 이종욱-이용규-이대형 등은 좌타자와 빠른 발로 이미지가 너무 똑같다. 이진영, 추신수, 김현수 등도 물망에 오르내리지만 이들 역시 좌타자이다. 급기야 김경문 감독은 공격력이 떨어지는 민병헌을 뽑았다가 자기 팀 선수 챙기기라는 비난을 받았고, 박재홍은 최종 엔트리까지 올랐다가 미끄러진 경험이 있으며, 이택근은 수비수로 부족하고, 김주찬은 부상에서 돌아와 아직 많은 것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이런 일은 매번 ‘중심타자 부재’라는 숙제를 안겨준다. 고영민, 박진만, 정근우 등은 팀에서는 중심타자로도 뛰지만 국가대표에서는 수비형 내야수로 분류되고, 결국 우리는 항상 이승엽이 오기만을 해바라기처럼 바라봐야 하는 난처한 입장에 놓인다. 발 빠른 외야수들의 빛과 그림자, 변화하고 있는 프로야구의 성장통이다. 유재근 엠엘비파크 기자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