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마라토너,이봉주“금메달두뇌싸움,독심술히든카드”

입력 2008-06-2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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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황)영조 오빠 때문에 (많은 메달들이) 묻혔어요.” 19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에 첫 금메달을 안긴 여갑순(34·대구은행)은 당시를 회상하며 웃었다. ‘올림픽의 꽃’ 마라톤의 금메달은 다른 금빛들을 삼킬 만큼 강렬했다. 4년 뒤, 올림픽대표선발전에서 탈락한 황영조가 은퇴를 선언했다. 충격은 컸지만 황영조와 동갑내기인 새 영웅이 금방 빈자리를 메웠다. 이봉주(38·삼성전자)는 예상을 뒤엎고 1996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후 12년간 한국마라톤을 짊어졌다. 그리고 8월, 생애 4번째 올림픽에 나선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뛴다”는 이봉주를 훈련지인 강원도 횡계에서 만났다. ○ 오뚝이 이봉주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다시 일어서는 것이 이봉주의 마라톤 인생이었다. 이봉주가 애틀랜타올림픽 이후 슬럼프를 겪을 때 많은 사람들은 단명한 마라토너 황영조를 떠올렸다. 하지만 이봉주는 1998로테르담대회에서 2시간7분44초의 한국기록을 세우며 재기에 성공했고, 1998방콕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0시드니올림픽에서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불운을 겪으며 24위에 그친 뒤에도 더 강해진 모습으로 돌아왔다. 2001년 세계최고권위의 제105회보스턴마라톤에서 월계관을 썼고, 2002부산아시안게임 1위에 오르며 아시안게임을 2연패했다. 2004아테네올림픽에서 14위에 그쳤을 때는 공공연히 은퇴설이 돌았다. 당시 나이 34세. “2008올림픽에도 도전하겠다”는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들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2007년 제78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4초의 기록으로 우승하며 살아있음을 알렸다. ○ 이봉주는 건재하다 삼성전자 오인환 감독은 “마라톤은 회복력이 관건”이라면서 “이봉주의 몸은 타고 났다”고 했다. 인간은 주에너지원으로 탄수화물을 사용한다. 이때 젖산이 분비돼 피로도를 증가시킨다. 마라톤은 젖산이 생성됨과 동시에 젖산이 분해되는 과정이다. 이봉주는 “훈련 중 혈액 내 젖산농도를 측정해 봐도 젊었을 때와 큰 차이가 없다”면서 “과학적으로도 몸은 건재하다”며 웃었다. 세계적인 마라토너 가운데는 30대 중·후반 선수들이 많다. 세계기록(2시간4분26초)보유자 하일레 게브르셀라시(35·에티오피아)를 비롯해, 아시아기록(2시간6분16초) 보유자 다카오카 도시나리(38·일본), 아테네올림픽금메달리스트 스테파노 발디니(37·이탈리아), 2003베를린마라톤대회에서 사상 최초로 2시간5분벽을 깬 폴 터갓(39·케냐) 등이 모두 현역이다. 오 감독은 “노장선수라도 체력이 떨어져서 못 뛰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문제는 부상위험이다. 우리 몸의 탄수화물은 90분 이상 격렬한 운동을 하면 모두 소진된다. 90분 이후에는 지방이 주연료인데, 탄수화물보다 효율이 떨어진다. 승부처인 30km이상을 지나는 시점이다. 오 감독은 “90분 이후의 결과는 훈련량에 따라 결정된다”면서 “노장들은 훈련량이 많아지면 부상 위험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봉주는 대관령을 하루 평균 40∼50km씩 누벼도 끄떡없다. ○ 독심술로 금빛 레이스 이봉주는 베이징올림픽에서 40번째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한다. 세계현역마라토너 가운데 최다(最多). “연습한 거리까지 합하면 15만km를 달렸다”고 했다. 지구둘레를 4바퀴나 돈 거리다. 경험이 달리기 실력만 늘려준 것은 아니다. 이봉주는 축지법에 독심술까지 쓴다. 마라톤이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운동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상대선수와의 치열한 두뇌싸움이 펼쳐진다. 어느 대회든 30∼40km 사이에서 승부가 갈린다. 이 때까지는 선두그룹에 속하는 것이 목표. 사전 작전은 있지만 상황은 가변적이다. 레이스 도중 감독이 주요길목에서 지시를 할 수는 있지만 이것 또한 제한적. 결국 승부를 거는 포인트는 선수가 판단한다. 이봉주는 “상대의 표정, 숨소리, 팔 동작까지 파악하면서 뛴다”고 했다. 이봉주가 턱수염을 기르고 선글라스를 쓰는 이유도 상대에게 표정을 읽히지 않기 위함이다. 올림픽 마라톤은 이변의 연속이었다. 서울올림픽 젤린도 보르딘(이탈리아), 바르셀로나올림픽 황영조, 애틀랜타올림픽 조시아 투과니(남아프리카공화국), 시드니올림픽 게자행 아베라(에티오피아)는 모두 금메달후보가 아니었다. 오 감독은 “베이징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이 가능한 선수는 30여명에 이른다”고 했다. 올림픽 판도가 안갯속인 이유는 올림픽이 기록싸움이 아니라 순위싸움이기 때문. 서울올림픽부터 최근 5개 올림픽 마라톤금메달리스트들은 모두 2시간10분벽을 깨지 못했다. 오 감독은 “이번에도 9분대에서 메달이 갈릴 것”이라고 했다. 올림픽 우승자 가운데 노장들이 많은 이유도 순위경쟁에서는 레이스 운영능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카를로스 로페즈(포르투갈)는 37세에 금메달을 땄다. 42km를 달려와 승전보를 전하고 숨을 거둔 필리피데스가 그랬듯 마라토너는 자신의 모든 것을 불태운다. 페르시아의 패전에서 유래된 까닭에 마라톤을 하지 않는 몇몇 이슬람국가를 제외하면 마라톤은 세계인의 존경을 받는 스포츠다. 이봉주는 “금메달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면서 “20년 육상인생을 쏟아 붓겠다”고 했다. 생애 최고의 레이스로 애틀랜타올림픽을 꼽은 이봉주. 1위 투과니에 뒤졌던 3초를 이제 뛰어넘을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횡계=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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