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열의포스트게임]미국속의베컴,임팩트는없었다

입력 2008-11-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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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축구스타 데이비드 베컴(33)이 축구의 변방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MLS)에서 활동한지도 햇수로 2년이다. 베컴에 대한 최근 뉴스는 LA 갤럭시가 내년 1월 이탈리아 세리에A의 AC 밀란에게 임대선수로 빌려준다는 내용이었다. 미국의 MLS는 3월부터 10월까지 시즌이어서 이 기간 동안 임대가 가능하다. 2007년 초 베컴의 미국행은 세계적인 뉴스였다.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에서 활약한 슈퍼스타가 축구의 기반이 허약한 MLS에서 뛴다는 것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많은 축구전문가들도 베컴의 미국행을 반대한 게 사실이다. 베컴을 보면 1988년 8월9일 캐나다를 충격에 빠뜨렸던 아이스하키 영웅 웨인 그레츠키와 여러 면에서 비교된다. 베컴이 영국의 자랑이며 영웅이었 듯, 그레츠키(현 피닉스 코요테 감독)도 캐나다의 국보였다. 당시 NHL 에드먼턴 오일러스 소속이었던 그레츠키는 아이스하키의 불모지 LA 킹스로 트레이드됐다. 그레츠키는 3차례나 에드먼턴을 스탠리컵 정상에 올려 놓은 하키의 지존이었다. 캐나다 언론은 그레츠키에게 항상 ‘The Great’ 웨인 그레츠키로 부르며 그에 대한 사랑을 아끼지 않았다. 에드먼턴 오일러스- LA 킹스의 트레이드는 이른바 ‘블록버스터 딜’이었고, 캐나다 팬들은 날벼락을 맞은 격이었다. 1967년 창단된 킹스는 이 때까지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1라운드를 통과한 적이 단 3번이었을 정도로 전력이 취약했다. 베컴의 미국행과 그레츠키의 LA 행에는 부인 변수가 있었다. 베컴이 LA 갤럭시로 이적한데는 부인 빅토리아 베컴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는 게 거의 정설이다. 여성 보컬 스파이스 걸 멤버 출신의 빅토리아가 할리우드를 활동무대로 하려고 갤럭시로 이적했다는 내용이다. 실제 부인 빅토리아 뿐 아니라 베컴도 할리우드를 무시할 수 없었다. 갤럭시로 온 뒤 베컴은 거의 할리우드 스타대접을 받으면서 폭넓은 장외활동을 펼쳤다. 베컴의 미국행 고리는 부인 빅토리아와 할리우드였다. 그레츠키의 트레이드도 부인 자넷 존스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크레츠키의 부인 존스도 영화배우 겸 댄서, 에어로빅 강사 등 할리우드에 어울리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요즘은 연예활동을 하지 않는다. 그레츠키가 킹스로 트레이드될 때 눈물을 흘렸는데 이 때 캐나다 몇몇 언론이 악어의 눈물이었다고 평가절하했던 게 이 때문이다. 두 시즌 갤럭시에서 활동한 베컴의 MLS 평가는 아직 이르다. 하지만 기대했던 베컴의 임팩트는 크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베컴으로 인해 MLS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다는 평가는 없다. 베컴은 미국에 오자마자 발목 부상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올해도 큰 기대를 했지만 갤럭시의 시즌은 실패로 끝났다. 그레츠키는 아이스하키 불모지 LA 킹스를 NHL 엘리트 구단으로 끌어 올리는데 절대 기여했다. 88년부터 96년까지 킹스에서 활동한 그레츠키는 5년 연속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92-93시즌에는 킹스 창단 이래 처음으로 스탠리컵 파이널(몬트리올 캐나디언스에게 1승4패)에 올려 놓으면서 ‘로스앤젤레스는 아이스하키 불모지’라는 이미지를 완전히 탈바꿈시켰다. 그레츠키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다. 베컴이 과연 MLS에서 성공한 축구 전도사가 될 지, 펠레, 바켄바우어 등 한차례 미국 축구를 스쳐간 세계적인 스타로 끝날지 그게 궁금하다. 문상열 스포츠동아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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