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친팔보고우는아내…이악물고부활했다

입력 2008-12-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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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서‘제2야구인생’활짝이·승·호
내 얘기 좀 들어볼래. 내 이름은 이승호(32). 5년 전만 해도 LG 에이스이자 한국 최고 좌완으로 통했지. 그런데 어깨가 아팠어. 수술을 받았지. 재활을 거쳐 복귀했지만 스피드가 나오지 않는 거야. 힘을 주면 팔이 아프고. 부상과 복귀가 반복됐지. 1군과 2군을 맴돌았고. 등번호(1번→37번)도 바꿔서 심기일전했지만 안 되더라고. 몸부림칠수록 사방이 벽에 막힌 기분이었어. 언젠가부터 아무도 에이스로 바라보지 않게 되고. 자신감을 잃게 되니 사람 만나는 것도 싫어지더라고. 밖에 나가기가 무서워지고. 정말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2008년을 시작했지. 그러나 내가 생각해도 공이 아니더라고. 절망, 허탈, 막막. 그러다 FA 이진영의 보상선수로 SK에 오게 됐어. 나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돼. ○미안해요 LG SK행을 처음 들은 곳은 남해였다. 연습경기 직전 SK에서 연락이 왔고, LG는 경기 종료 직후 통보를 줬다. 그날 등판이 없었던 이승호는 LG 벤치에서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기대감과 실망감이 교차했어요. 내가 더 잘했으면, 더 해줬으면 LG의 성적이 이렇게 되지 않았을 텐데, 내가 더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내 앞에선 말 안했지만 LG도 힘들었겠죠.” 그 경기가 끝나고 LG와 작별을 고한 이승호는 서울 집으로 올라갔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울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지목한 SK 김성근 감독은 ‘고맙게도’ 나약한 감상에 빠질 틈조차 주지 않았다. “곧바로 일본 고지캠프에 합류하라”는 지령이 떨어졌다. ○재회, 그리고 구원의 한마디 야구계에선 이승호를 김성근의 작품이라 말한다. 전성기는 2003년에 만개했지만 김 감독은 2001-02년 이승호를 만들어놓고 떠났다. 그도 인정한다. “2001년 마무리캠프를 오키나와 나고에서 했어요. 다른 투수도 많이 던졌지만 감독님은 저에게만 ‘하나 더 던져’라고 하셨어요. 그렇게 400∼500개를 매일 던졌던 것 같아요. 2002년엔 지방원정을 가면 저만 버스에 타지 말고 뛰어서 숙소에서 야구장까지 오라고 하셨어요. 그땐 유니폼 입고 뛰어다니려니 창피하기만 했는데 그게 다 하체 훈련이었죠.” 그로부터 6년여가 흘러 고지 캠프에서 김 감독과 재회했다. “처음 뵈니 ‘반갑다’ 딱 한마디셨어요. 그 다음 곧바로 던졌죠.” 김 감독이 손봐준 부분은 딱 하나, 팔 스로윙이었다. 부상 후유증으로 위축돼 있던 스로윙을 크고, 부드럽게 하라고 지적한 뒤 지켜만 봤다. 제자는 던지고 스승은 지켜봤다. 서로 말이 없었다. 얼마나 던졌을까, 스승은 딱 한마디를 남겼다. “안될 줄 알았는데 되네.” 그 한마디에 제자는 생명을 다시 얻은 기분이었다. ○과거형은 잊고 절박함을 되새겨 김 감독이 LG를 떠난 2003년 이승호는 몬스터시즌을 맞았다. 탈삼진 1위 방어율 2위. 아테네올림픽 삿포로 예선전엔 대표팀의 제1선발을 맡았다. 그때는 ‘한가운데 던져도 안 맞는다’란 자신감에 넘쳤다. 승승장구하다 어깨가 아팠다. 2004년 10월28일 수술을 받았다. 그래도 영원한 LG 에이스라 과신했다. ‘전에는 내가 이랬는데’란 과거형 속에 살았다. 그러다 보상선수로 타의로 SK로 왔다. 서운함보다 돌파구가 열리는 기분이었다. 물러설 데가 없다. 다시 야구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전훈 가기 전까지 고교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려고 알아보고 있다. 이렇게 절박한 적이 없었다. 아내와 핸드폰에 저장된 딸 채현(4)이 사진을 보고 ‘은퇴 빼곤 뭐든 다 하겠다’는 각오를 되새긴다. 김 감독은 “정말 죽을 각오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은 없다”란 인간정신을 긍정하는 주의자다. 이 점에서 이승호는 2009년 ‘김성근의 페르소나’다. 김영준기자 gatzb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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