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기자가간다]“어깨는B급·타격은C급…계약금0원OK?”

입력 2009-05-13 07: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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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이크도 못 넣는 투수. 공 피하기 급급한 타자. 만세 부르기 일쑤인 야수. 이런 선수를 원하는 구단주는 없다. 하지만 야구를 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OK. 결국 계약금 0원에 입단계약을 맺었다. 물론, 계약서도 플래시 세례도 없다.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실업야구트라이아웃도전기
짐 모리스(45). 메이저리그 통산 21경기에 출전, 승패 없이 방어율 4.80. 기록만 봐서는 아무런 감흥이 없는 투수.

그래서 야구가 그려내는 서사는 기록만 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투수.

불의의 부상으로 빅리거의 꿈을 접은 그는 야구코치 겸 교사로 제2의 삶을 엮어갔다.

‘너희가 지역예선을 통과한다면 나도 다시 메이저리그에 도전 하겠다’는 제자들과의 약속, 그리고 트라이아웃 도전. 1999년, 35세의 나이에 그는 157km의 강속구를 뿜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지옥에 가서라도 데려오라’는 좌완 파이어볼러였다.

그렇게 35세의 루키(Rookie)는 빅리그 무대에 섰다.

영화 같은 실화는 결국 영화가 돼 야구팬들을 다시 만났다. ‘루키(The Rookie)’라는 제목으로.

여기 또 하나의 ‘루키’를 꿈꾸는 사람들이 있다.

야구가 좋아 글러브를 끼었지만, 모두 뜻하지 않게 그라운드를 떠났다.

2008년 깃발을 올린 한국실업야구연맹(회장 박영길)은 그들에게 야구의 혼이 숨쉬는 대지를 빌려주었다.

4월26일, 제1회 실업야구선수 트라이아웃이 열린 서울 양천구 신월야구장을 찾았다.
‘루키의 꿈’ 안고 싱글K 과감한 도전장

○목표는 싱글K선수 지명


실업야구연맹은 17일부터 트리플K리그를 창설한다. 일구코리아와 서울생(生)주조, 국제스포츠, HP컴퓨터 등 4∼5개 팀이 참가할 계획.

4월 25∼26일까지 진행된 트라이아웃에는 80여명의 전직선수들이 참가했다. 이 가운데는 프로출신도 20여명이나 됐다.

재능 있는 선수들을 선발하기 위해 각 팀 감독들은 눈을 반짝였다. 김용철(52) 전(前)롯데, 경찰청 감독과 히어로즈 서한규(36) 스카우트도 눈에 띄었다.

“트리플K리그는 일종의 재수학원입니다. 프로팀과 직장 팀의 다리가 되어야죠. 여기서 잘하면 프로2군에도 가고, 일본 독립리그에도 진출하도록 할 것입니다.” 박영길(68) 회장의 욕심은 대단했다.

실업야구연맹은 2일부터 트리플K의 하부리그인 더블K와 싱글K도 출범시켰다.

선수출신으로만 구성되는 트리플K와는 달리, 더블K와 싱글K는 선수출신의 최소보유기준을 갖추게 된다.

김양경(62) 전(前) 일구회장은 “세미실업야구 형태의 직장야구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싱글K리그 선수로 눈도장 찍기’를 트라이아웃 체험의 목표로 삼았다.

스트라이크도 못 넣는 투수. 공 피하기 급급한 타자. 만세 부르기 일쑤인 야수. 이런 선수를 원하는 구단주는 없다. 하지만 야구를 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OK. 결국 계약금 0원에 입단계약을 맺었다. 물론, 계약서도 플래시 세례도 없다.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홍일점과 캐치볼 “여자에게 질수야 없지”

○아메리칸 스타일 대(對) 코리안 스타일


박 회장은 김응룡(68·삼성라이온즈 사장)과 함께 60-70년대 한국야구를 호령하던 왼손 거포. 롯데·태평양·삼성에서 프로야구 감독생활도 했다.

“다른 부분들은 다듬을 수 있으니 어깨가 강한 선수들을 유심히 봐. 그런 애들 중에 장타자들도 많거든.”

박 회장이 일구코리아 김성균(前두산) 대표에게 한 얘기를 엿들었다. “일단 캐치볼부터 해보라”는 말에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캐치볼 상대는 참가자 중 유일한 홍일점 제인 어(19). 재미교포로, 최근 국내프로야구단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아 화제가 됐던 선수다.

여성에게 질 수 없다는 치기가 샘솟을수록 어깨는 더 아파온다.

제인 어의 포지션은 유격수. 보통 국내선수들은 오버스로로 송구를 익힌다.

포구하기 좋은 공이 들어오기 때문.

실제로 SK 김성근 감독은 오버스로로 송구하라는 지시를 어긴 선수를 트레이드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제인 어는 스리쿼터로 공을 던졌다. 자연히 송구는 옆으로 흐른다.

그녀는 “난 이렇게 배웠다”고 했다. 서한규 스카우트는 “송구동작을 더 빠르게 하는 장점은 있다”면서 “미국에서는 저런 식의 송구동작을 많이 사용한다”고 했다.

아메리칸 스타일에 코리안 스타일로 응수. 하지만 오버스로로 해도 공은 삐뚤빼뚤 이었다.

스트라이크는 언감생심…컨트롤 들쑥날쑥

○내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다


투수조로 이동했다. 홍성흔(롯데), 이승엽(요미우리)과 동기인 문용두(33)씨가 참가자 중 최고령이었다.

건국대 졸업 이후 군산중학교에서 코치생활을 하던 그.

제자들을 가르치던 어느 날, ‘힘을 빼고 던지라는 것이 바로 이런 느낌이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이제 구속이 130km대 밖에 안나오겠지만, 그래도 내 자신을 시험해보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트라이아웃이란, 남보다 더 돋보여 누군가의 눈에 들어야하는 공간.

하지만 이곳에서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려는 사람은 없었다.

단지, 그간 갈고 닦은 내 자신을 최대한 보여줄 뿐.

처음본 사이가 대부분이었지만, 멋진 투구에는 자연스레 박수가 나왔다.

나도 모르게 나온 짧은 외침. “나이스, 볼!”

“투수는 자신 있다 했지?” 박 회장의 호출. 마운드에 올랐다. 상대 타자는 없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내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이니.

투구 수는 10개. 박 회장은 “전력으로 던져서 3개만 스트라이크존에 넣어보라”고 했다.

왼발을 내디딜 때마다 기우뚱. 마운드가 빙판처럼 미끄럽다.

컨트롤도 들쑥날쑥. 서한규 스카우트가 “밸런스가 안 맞아서 그렇다”며 기를 죽였다.

역시 동료들뿐이다. 서경상(31·성균관대졸)씨는 “발을 보라”고 했다. 운동화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있었다.

“스파이크를 안 신었으니 당연히 미끄러지죠. 마운드 경사가 얼마나 심한데….” 동료들과의 하이파이브. 위안을 얻었다.

스트라이크도 못 넣는 투수. 공 피하기 급급한 타자. 만세 부르기 일쑤인 야수. 이런 선수를 원하는 구단주는 없다. 하지만 야구를 할 수만 있다면 어디든 OK. 결국 계약금 0원에 입단계약을 맺었다. 물론, 계약서도 플래시 세례도 없다.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5구 만에 삼진…사회인 야구팀 눈높이 입단

○극적인 입단계약


마지막 관문, 실전타격. 투수는 박홍준(28·청주세광고졸)씨.

사실, 박씨와는 투수 조에서 이미 밀담을 나눴다.

“아시죠? 저 타석에 서면, 살살.” 헬멧을 살짝 벗어 인사를 했다. 하지만 덕아웃에서와는 달리, 그의 입가에는 미소가 없었다.

초구 바깥쪽 직구. “스트라이크.” 스트라이크는 본디 타자가 능히 칠 수 있는 코스가 기본.

하지만 이 공은 칠 수 있는 코스 가운데 가장 치기 어려운 곳을 통과하는 모순을 보여줬다. 소위 ‘걸치는 공’이었다.

2구. 같은 코스에 스트라이크. 눈은 따라가는데 손이 안나갔다. 3구는 원 바운드 변화구. 이 공은 정말 골랐다.

4구는 또 바깥쪽 직구. ‘당했구나.’ 덕아웃으로 들어가려는데 심판의 손이 안 올라갔다. “굿(Good) 아이(Eye).”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 고른 게 아니라 못 친 것인데….

하지만 미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5구 몸쪽 높은 공 헛스윙, 삼진. 바깥쪽 공 4개를 보다가 눈앞에 몸쪽 공을 보니, 반사적으로 배트가 나갔다.

고개를 숙이고, 타석에서 나오다 박 회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래도 저 공5개나 던지게 했는데요.” 애꿎은 머리만 긁었다. 어이없다는 박 회장의 웃음.

저 쪽에서 김용철 전(前)감독이 다가왔다. “내가 꾸리는 사회인 야구팀이 2개 있는데 혹시, 생각 있어?” 타격은 C급.

하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충분히 통할만한 어깨를 지녔다는 평가.

순식간에 입단계약이 맺어졌다. 팀명은 도이치뱅크. 모 축구선수처럼 계약금은 0원이다.

80여 명 중에 실업팀 지명을 받을 선수는 40여명. 절반은 또 다시 가슴에 꿈을 묻어야 한다.

트라이아웃이 끝난 그라운드를 초등학교 꿈나무들이 채웠다.

“너, 야구 재미있니?” “네.” 공을 쥔 어린이는 신나게 그라운드로 달려 나갔다.

뒤편으로는 트라이아웃을 마친 몇몇 선수들이 빛바랜 스파이크에 묻은 진흙딱지를 떼어내고 있었다.

“다음에 또, 신어야죠.” 도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신인. 그래서 이들은 여전히 루키(Rookie)였다.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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