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율화의 The Fan] 야선(野仙)으로 가는 5단계

입력 2011-03-04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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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의 세상이 마법사와 비(非) 마법사로 구분되듯, 야구팬의 세상은 야구팬과 비 야구팬으로 나뉜다. 오직 야구팬이라는 이유 하나로 그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증상들. 서로가 동족임을 알아보게 하는 몇 가지 증세들을 ‘팬심’의 단계별로 모아 보았다.

이제 막 야구의 재미를 알기 시작하는 1단계에는 갓 사랑을 시작한 연인들 같은 증상을 보인다. 시도 때도 없이 내 팀과 내 선수를 자랑하고 싶고, 행여 우리 팀을 폄하하는 댓글이라도 보는 날에는 지구 끝까지라도 쫓아가 응징한다.

온라인 서점에서 자주 ‘야구’라는 단어를 입력해 신간을 검색하며, ‘압구정 포차’를 ‘야구장 포차’로 잘못 읽는 등 전혀 맥락도 없는 상황에서 뜬금없이 야구를 떠올리곤 한다.

2단계는 심화의 단계다. 1단계에서 다져진 필력과 맷집으로 각종 야구 게시판의 유명 유저로 등극한다. 트위터의 팔로워, 미니홈피의 1촌은 거의 다 야구로 인해 알게 된 사람들이고, 대형 TV로 야구 중계를 틀어주는 단골 술집이 곳곳에 있다.

야구장에 가기 위해 족보에도 없는 분을 고인으로 만들기는 예사. 각종 모임, 쇼핑, 병원 진료 등은 월요일에 몰아서 하는 센스도 기본이다.

3단계는 비판적 관망의 자세. 야구장에 가면 환호와 응원보다는 욕설하는 시간이 더 많아지고, 날이 갈수록 징크스가 다양해져 일상생활이 불편할 지경이다. 그러다가도 길가다 우리 팀 유니폼을 입은 사람을 만나면, 만주 벌판에서 독립군 동지를 만난 듯 반가워서는 무턱대고 말을 걸고 싶어진다.

4단계. 남녀관계로 치면 10년쯤 산 부부와도 같은 경지랄까. 더 이상 예쁘지도 곱지도 않지만, 더러운 게 정이려니 하며 체념과 자학으로 버틴다. 야구는 더 이상 취미가 아닌 생활 그 자체가 되어 일상에서 야구 관련 용어를 자연스럽게 사용하고(예를 들어 “흥! 이대호 50도루 하는 소리 하네!”) 각종 모임에서 우리 팀의 응원가를 진지하게 불러 빈축을 사기도 한다.

포털 사이트에 내 이름을 치면 줄줄이 야구 게시물이 나오고, 지나간 야구 경기를 PMP에 담아 보며 깔깔대고 웃는 내 자신에 흠칫 놀란다.

당연히 나는 1∼3단계를 거쳐 이제는 4단계다. 가끔은 그깟 공놀이 때문에 내가 너무 멀리 온건 아닌가 싶어 한숨도 내쉬게 되지만, 어떠랴. 뭇 세상사에 시달려 괴로워하면서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는 것은 야구라는 숨통이 존재하는 덕분이니. 그래. 어쩌면 나는 이제 달관과 해탈이라는 5단계에 접어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야선(野仙) : 야구의 신선

구율화 변호사

야구선수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 마련에 관심이 많다.
야구계 변방에서 꾸준히 팬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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