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타의로 벗은 심판 마스크 6년…이젠 복귀 꿈 접었죠”

입력 2012-05-3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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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 출신의 공채 1기 심판으로 활동하다 뜻하지 않게 마스크를 벗은 허운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운영위원. 1982년 삼미의 유격수로 시작해 30년 넘게 프로야구계에서 살아왔다. 후배 심판들에게 더 좋은 환경을 물려주지 못해 거듭 미안하다고 했다. 목동|김민성 기자 marineboy@donga.com 트위터@bluemarine007

명심판 출신 KBO 경기 운영위원 허운

딱 1955경기에서 출장을 멈췄다. 부상이나 본인의 의지로 그만둔 것이 아니다. 허운 전 한국야구위원회(KBO) 심판위원. 지금은 그라운드 밖에서 후배 심판들과 기록원들의 판단과 결과를 평가하는 KBO 경기운영위원으로 일한다.


1500만원짜리 수표에 홀려
삼미슈퍼스타즈 원년 멤버 입단
잦은 부상에 4년만에 현역 아듀

KBO 심판 공채 1기로 제2인생
몸사움·가래침 봉변…사연도 많아
경기후 새벽 운전하다 죽을 고비도

2000경기 ‘-5’서 터진 심판의 난
위원장 놓고 알력? 이간질에 당한 것
징계후 현장 복귀 투쟁 끝내 무위로
후배들에 좋은 환경 못 물려줘 미안



○그 때 그 사건, 아쉬운 출장 중단

“아쉽다”고 했다. 심판으로서 최소 2500경기 출장은 가능했는데 뜻하지 않게 중단된 것이. 2000경기도 채우지 못해서 더욱 그랬다. 2007년의 일을 묻자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속상하다”며 언급을 꺼렸다.

뉴스를 검색했다. 심판위원장 선임을 놓고 허운 심판과 김호인 심판 간에 알력이 생겼고, 징계를 받아 2군으로 내려간 허운 심판의 컴백을 요구한 후배 심판들이 경기 보이콧으로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 돼 있다. 솔직한 목소리를 원했다. “김호인 형과 내가 자리다툼을 했다는 것부터 오해다. 형제보다 친한 사이다. 집도 바로 옆이다. 부부끼리 서로 잘 알고 같이 밥도 먹고 다니는 사이다. 형이 심판위원장으로 내정된 뒤 나랑 잘해보자고 상의한 것이 사건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 형이 나 때문에 고생한 것도 잘 안다”고 밝혔다.

그럼 왜 그렇게 됐을까. “매스컴플레이에 당했다. 나중에 감정이 격해졌다. 이간질에 서로가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심판만 피해를 봤다. 누군가가 심판들의 힘을 빼려고 했는데 내가 걸림돌이 됐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4년의 선수생활, 아쉬움은 없다!

심판 허운은 잘 알려졌지만 선수 허운은 기억 저 너머에 있다.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에서는 실수를 거듭하는 유격수로 나온다.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다. 중앙대 졸업반 유격수는 프로행을 주저했다. “어깨가 아팠다. 제일은행과 입단하기로 약속도 했다. 군에도 가야 했다. 아마야구에 있으면서 상황을 본 뒤 나중에 프로에 가려고 했다.”

서울 종로 삼일빌딩에서 구단 관계자를 만났다. 눈앞에 1500만원이 적힌 수표가 있었다. “수표에 적힌 0이 몇 개인지 제대로 세지도 못했다. 수표를 내놓는 순간, 내가 구단 관계자를 만나면 이렇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당시 중앙대 앞에서 잘 나가는 커피숍 운영권이 1200만원이었다. 주인이 나보고 인수하라고 할 때였다.”


○삼미와 청보

1982년 프로선수가 됐다. 마산에서 동계훈련을 하는데 ‘아시아의 철인’ 고(故) 박현식 감독의 꾸지람을 매일 들었다. “잘못 데려왔다”고. “너 야구 어디서 배웠어”를 입에 달고 살았던 박 감독이었다. 18연패도 당해봤다.

좋았던 때도 있었다. 1983년이었다. 재일동포 장명부, 이영구가 오면서 삼미는 기적을 만들었다. 장명부는 정말 대단한 선수였다. “최고 선수가 온다고 해서 기대가 많았다. 처음엔 계속 피칭을 미뤘다. 살살 공을 던지기만 했다. 슬로볼로 컨트롤만 체크했다. 시범경기 때 나가면 맞았다. 연습경기 때도 자원해서 던졌는데 위력이 없었다. 모두들 속았다. 퇴물이라고 생각했다. 걱정이 많았는데 막상 시즌에 들어가니 달라졌다. 그동안 한국타자들의 특성을 파악하던 것이었다. 주자가 없으면 슬슬 던지다가 2루쯤 가면 그때 전력으로 피칭을 하는데 그런 야구를 처음 봤다.”

삼미는 2.5게임차로 전반기 선두를 달리다 6월 해태와의 광주 원정에서 3연패하며 결국 주저앉았다. “광주 팬들 때문에 졌다. 우리 숙소로 팬들이 몰려와 밤새도록 꽹과리를 치고 잠을 못 자게 했다. 경기장에서도 험악한 분위기를 만드는 통에 선수들이 주눅들 수밖에 없었다.” 해태의 9번 우승 뒤에는 호남 팬들의 그런 열정이 있었다.

무릎 부상으로 재활하던 도중 삼미에서 청보로 팀이 교체됐다. “새 유니폼만 받고 끝났다.” 4년 만에 선수생활 종료. 잘 한 것도 없었기에 아쉬움도 없었다.


○애착 가는 심판생활

1986년 KBO 1기 심판이 됐다. 선수생활을 마친 뒤 이용일 KBO 사무총장의 권유로 심판모집에 참가했다. 동기가 김호인, 조종규다. 당시 조장이 김광철. 막내 심판이 되면서 선배들의 스파이크를 닦고 양말을 빠는 일부터 했다. “프로가 되면서 하지 않던 일이었다. 심판들의 위계질서였다. 나중에 보니 그런 질서가 있어야 젊은 심판들이 경기에 집중한다는 것을 느꼈다.”

젊은 심판이지만 목소리는 컸다. 룰북에 따르려고 노력했다. 당시 야구계에선 심판도 야구 선후배로 얽혀있다 보니 선수나 감독들이 항의를 하면서 심판으로보다는 후배로 대했다. 이건 아니다 싶었다. 싸웠다. 야단도 많이 맞았다. 버텼다. “나는 후배 이전에 심판이다. 심판이 바로 서야 경기가 바로 설 수 있다”며 피하지 않았다.


○사고도, 사연도 많은 심판생활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심판생활. 판정은 정확했지만 사고도 많았다. 김응룡, 김성근 감독과 인연도 많았다. 광주에서 벌어진 더블헤더였다. 1경기가 끝나고 문제가 생겼다. 심판실로 들어오다 김응룡 감독과 심판 한 명이 몸싸움을 했다. 간신히 말리고 들어오는데 심판실 테이블 위에 간식이 있었다. 다음 경기를 위해서 누군가 밥을 먹고 있었다. 이 상황에 밥이 넘어가느냐며 상을 엎어버렸다.

“전주 경기였다. 주심은 이창원. 김성근 감독의 제자였다. 김 감독이 어필을 하는데 심판과 감독의 관계가 아니었다. 팀장으로서 내가 코치들을 퇴장시키자 감독이 ‘나를 퇴장시키라’며 머리로 들이받아 쇄골을 다쳤다.”(김성근 감독은 지금도 이 사건은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대구 경기에선 관중으로부터 가래침을 맞기도 했다. “경기를 마치고 나오는데 관중 한 명이 계속 욕을 했다. 얼굴을 쳐다보는데 가래침을 뱉었다, 하필이면 내 뺨에 정통으로 붙었다. 화가 나서 마스크를 철망을 향해 던졌다. 징계를 받았다.”

그래도 심판 후배들은 따랐다. 최고의 판정을 위해 노력하고 심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을 알기에 사람이 몰렸다. 시즌 내내 야간에 이동하다보니 죽을 고비도 있었다. 새벽에 졸면서 운전하다 덤프트럭 밑으로 승용차가 들어갈 뻔했다. 30여년 프로야구에서 심판이 이동하면서 큰 교통사고가 없었다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했다.

그동안 지켜본 경기 가운데 판정이 완벽했던 경기를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한번도 없다”고 답했다. “심판판정에는 항상 아쉬움이 남는다. 남들이 잘 봤다고 해도 내가 만족하지 못한다. 인간인 이상 완벽은 없다.” 투수에게는 퍼펙트 피칭이 있지만 심판에게는 퍼펙트 판정이 없는 모양이다.


○마지막 말

마스크를 벗은 지 6년. 현장으로 돌아가려고 투쟁도 하고 기다려도 봤지만 이제는 포기했다. 그 때문에 속병도 났지만 “여기까지인가 보다”라며 마음을 정리했다. 대신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지 못하고 물러난 것, 그런 환경을 만든 소용돌이에 자신이 있었던 것에 대해선 안타까운 속내를 여러 번 드러냈다. 인터뷰 끝에 그가 몇 번 강조했던 말이 있었다.

“심판계에는 결코 파벌이 없다. 결국 심판만 피해자다. 심판의 판정에 대해 말이 많지만 지금 심판들은 우리 때보다 훨씬 좋은 판정을 한다. 심판은 경기장에서 누구보다 최고의 위치에서 눈으로 판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 어떤 카메라도 심판보다 좋은 위치에 있지는 않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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