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파워포워드로 꼽히는 칼 말론(전 유타)의 별명은 ‘우편배달부’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꾸준한 활약을 했기 때문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우편배달부를 꼽자면 단연 13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한 박한이다. 박한이가 18일 포항 NC전에서 끝내기 3점포를 쏘아올린 후 환호하고 있다.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삼성 박한이(34)가 19일 잠실 두산전에서 역대 두 번째로 ‘13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달성했을 때 류중일 감독은 “꾸준함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훌륭한 기록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한이’라는 이름 석자는 이제 한국프로야구에서 ‘꾸준함’의 대명사가 됐다. 2001년 프로 데뷔 후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언제나 한결같은 플레이로 그라운드를 지키면서 감독이나 동료선수들, 팬들에게 모두 신뢰를 받는 선수로 자리 잡았다. ‘꾸준함을 이길 그 어떤 재주도 없다’는 책도 나왔듯, 세상엔 꾸준함의 힘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그는 올 시즌 자신의 9번째 한국시리즈와 6번째 우승을 준비하고 있다. 그리고 생애 두 번째 프리에이전트(FA)를 앞두고 있다. 20일 대구구장에서 박한이를 만나 13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한 비결과 그의 야구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100안타, 처음엔 주전선수라면 당연시
이젠 내 야구인생의 마지막 자존심이죠
30대 되니 체력 저하…수비 때 전력질주
FA 복·상복도 없지만 13년 뛴 게 어디냐
우승반지 5개…아내가 은행 맡겨뒀다나
가능하면 열 손가락에 다 끼워 보고 싶어
-13년 연속 100안타를 때렸다.
“올해는 힘들 것 같았는데 다행히 기록을 이어갈 수 있게 돼 기쁘다.”
-박한이에게 100안타는 어떤 의미인가.
“마지막 자존심이다. 내가 야구할 수 있는 날이 언제까지일지 모르지만 이제 100안타 기록이 없다면 의욕이 안 생길 것 같다. 이거라도 있으니까 아파도 참고, 경기를 뛰는 거다.(웃음)”
-13년 연속 100안타는 대단한 기록이다. 큰 부상도 없어야하고, 꾸준함이 있어야 가능하다. 비결이 있나.
“특별한 비결이 있겠나. 그냥 열심히 하는 거다. 처음엔 한 시즌 100안타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주전 선수라면 안 아프면 한 시즌 안타 100개는 칠 수 있다. 프로 들어오고 3∼4년까지는 유니폼에 흙먼지가 묻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경기 나가면 그냥 슬라이딩하고,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뛰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지나고 기록도 쌓였다. 9년, 10년 연속으로 하다보니 계속 100안타를 때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느끼게 됐다. 이젠 애착이 생긴다. 그런 면에서 16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를 기록한 양준혁 선배가 대단하다.”
-양준혁을 넘어야하지 않겠나.
“웬만한 선수는 프로에서 16년 동안 뛰는 것도 힘들다. 16년 연속 100안타는 정말 어려운 기록이다. 쉽게 말해 신인 때부터 은퇴할 때까지 한 해도 빠짐없이 100안타를 쳐야하는 것이니까. 양준혁 선배가 조금만 더 짧게 기록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튼 양준혁 선배 기록에 도전해 보겠다. 내가 다른 기록 도전할 게 뭐가 있나. 하나는 넘버원을 만들고 은퇴하자는 생각이다.”
-프로 13년째인데 야구가 어떻게 느껴지나.
“인생살이처럼 잘 나가다가도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게 타격이다. 잘 맞은 타구가 야수 정면으로 자꾸 가면 ‘멘붕(멘탈붕괴) 상태’가 된다. 그러면 슬럼프가 온다. 슬럼프 때 안타 하나라도 기록하고 싶어 기습번트를 대 보기도 한다. 그런데 슬럼프 때는 기습번트를 해도 안타가 안 된다. 뭘 해도 안 된다. 야구가 잘 될 땐 그 기간이 짧게 느껴지고, 못할 땐 그 기간이 길게 느껴진다. 야구가 그래서 더 어렵다.”
-요즘은 어떤 생각으로 야구를 하나.
“야구를 하다보니 단계가 있더라. 처음 3∼4년차까지는 앞만 보고 달렸다. 몇 년 전부터 중간 입장이 되다보니 생각하는 야구를 하게 되더라.”
삼성 박한이. 사진제공|스포츠코리아
-지금은 어떤 단계인가.
“30대 되니까 체력이 1년 1년 다르다는 걸 느낀다. 체력이 떨어지면 안 된다. 모르는 사람들은 경험이 많으니까 적당히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어린 선수보다 2∼3배는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몸을 사릴 수도 없다. (대구구장의 우익수 위치를 가리키며)저 자리 뺏기면 이젠 내 자리 없다.(웃음) 지금은 더 책임감을 갖고 절박하게 야구하는 단계다. 요즘엔 ‘나중에 내가 은퇴하고 나면 야구를 그만둔 순간이 추억으로 남을까, 아쉬움으로 남을까’라는 생각을 많이 한다. 후회스럽게 야구를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수비 나갈 때 그렇게 열심히 뛰는가.
“지난해 팀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류중일 감독님이 ‘공수교대 때 각자 수비 위치까지 뛰어다니자’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때부터 우리 팀 선수들은 모두 수비를 나가거나 들어올 때 전력으로 뛰고 있다. 그런데 대구구장은 홈팀 덕아웃이 3루 쪽에 있지 않은가. 내 수비 위치가 제일 멀다. 전력질주를 하다 보니 처음엔 힘이 빠져 타석에서 방망이를 치기 힘들었다.(웃음) 그런데 그렇게 뛰어다니다 보니까 작은 거지만 의미가 있더라. 땀도 나고, 몸도 가벼워진다. 목동이나 포항구장 가면 살 것 같다. 거긴 우리 팀이 1루 쪽 덕아웃을 사용하니까.(웃음)”
-자리가 없다는 얘기를 하니 4년 전 FA 미아가 됐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는 ‘내 가치가 이것밖에 안 됐나?’라는 생각에 힘들었다. ‘내가 이 팀에서 못했나?’, ‘이 팀에 정말 필요 없는 존재였나?’ 삼성에 엄청 섭섭했다. 이 팀 말고 다른 팀도 많다 싶어 밖에 나왔는데 다른 팀에서도 연락이 없었다. 특출 나지는 않았지만 나름대로 야구는 좀 했다고 생각했는데 속으로 ‘야구 헛했구나’ 싶더라. 그때 소속팀도 정해지지 않은 채 결혼도 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그러다 다시 삼성과 2년 계약을 했다.
“솔직히 그때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좌절을 해버리면 야구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이 끝날 것만 같았다. 전지훈련을 가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다. 지금도 열심히 하지만 그땐 정말 열심히 했다.”
-FA 복도 없었지만 상복도 정말 없는 선수로 꼽힌다.
“그렇긴 하다.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대학생(동국대) 신분으로 참가했다. 팀 막내로 금메달을 땄다. 그때만 해도 내 야구인생은 잘 나가는 줄 알았다. 삼성에 들어와 첫해 전반기만 해도 신인왕은 그냥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후반기에 김태균(한화)이 갑자기 홈런을 몰아치면서 툭 튀어나와 신인왕에서 미끌어졌다. 그 이후 계속 상복도 꼬인 것 같다. 2003년엔 최다안타 1위를 하고도 골든글러브도 못 받고…. 그러나 어쩌겠나. 복 없다고 한탄만 할 수도 없다. 사실 이것도 복 있는 거다. 프로에서 1∼2년 야구하다 그만두는 선수도 많은데 13년 연속 계속 뛸 수 있다는 게 어디냐.(웃음). 좋은 감독님, 좋은 코치님들 만났고, 올 시즌 후에 두 번째 FA 기회도 또 왔고…. 좋은 쪽으로, 긍정적으로 생각하겠다.”
-2001년 박한이가 입단한 뒤 삼성은 지난해까지 12년 중 11년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리고 8번 한국시리즈에 올랐고, 5번 우승했다. 삼성의 전성시대는 박한이의 입단과 함께 열린 셈이다.
“그런가?(웃음). 내 이름도 여기서 펼쳤다. 궁합이 잘 맞았던 것 같다. 만약 된다면 은퇴할 때 삼성에서 영구결번이 됐으면 좋겠다. 그걸 위해 앞으로도 안 다치고 앞만 보고 달리겠다.”
-다섯 손가락에 우승 반지를 끼었는데.
“솔직히 그 반지 다 어디 가 있는지 모른다. 아내가 은행에 맡겨뒀다고 하는 것 같던데….(웃음) 야구하면서 한국시리즈 한 번 못 가보고 은퇴한 선수들도 많은데 나는 복 받았다. 그런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 2005년과 2006년 2년 연속 우승했지만 2007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졌다. 정말 허탈하더라. 한 번 우승하면 두 번, 두 번 우승하면 세 번 우승하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다. 작년, 재작년 2년 연속 우승했지만 2007년 기분을 다시 느끼고 싶지 않다. 올해 내 생애 12번째 포스트시즌과 9번째 한국시리즈, 6번째 우승을 경험하고 싶다. 가능만 하다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하면서 열 손가락에 다 우승 반지를 끼고 싶다.”
대구|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eystonele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