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장은 망신의 무대로 바뀌었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명문 아스널과 사령탑 아센 웽거 이야기다.
1996년 아스널 지휘봉을 잡은 웽거 감독은 자신의 1000번째 공식 경기에서 축구 인생 ‘최악의 날’ 중 하루를 보내야 했다. 24일(한국시간) 영국 런던 스탬포드 브릿지에서 열린 오랜 라이벌 첼시와 원정 경기였다. 아스널의 전현직 선수들은 결전을 앞두고 각종 영상 메시지를 통해 스승의 업적을 기리며 축하했지만 웽거 감독은 정작 웃을 수 없었다. 전반 15분 키이런 깁스의 퇴장과 맞물린 0-6 대패로 침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웽거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오직 영국 공영 BBC와만 인터뷰를 했다.
“오늘 대패의 책임은 내게 있다. 오늘 경기와 관련해 더 이상 언급하는 건 의미 없다. 다음을 내다봐야 한다. 불과 20분 만에 우리의 경기는 끝이 났다. 우승은 아주 힘들어졌지만 시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할 뿐이다.”
아스널은 불운까지 겹쳤다. 희대의 오심이 나왔다. 주심인 안드레 마리너 감독은 핸드볼 파울을 범한 아스널 채임벌린 대신 아무 문제가 없던 깁스를 퇴장시켜 논란을 일으켰다. 오심과 관련해 웽거 감독은 “심판이 핸드볼 장면을 보지 못했다면 최소한 부심들과 확인을 해야 한다. 이런 큰 무대에서 선수를 잘못 퇴장시켜 유감”이라고 했다.
웽거 감독의 충격은 대단히 커보였다. BBC와의 방송 인터뷰를 한 뒤 공식 기자회견장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예정됐던 주중 미디어데이 행사도 취소시켰다. 영국 기자들은 “체면을 제대로 구겼으니 창피해서 언론을 기피하는 게 아니냐”고 불만의 목소리를 높였다.
선수들도 사과 행렬에 동참했다. 아스널의 미켈 아르테타는 자신의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클럽과 우리 팬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다. 첼시전은 아스널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다”며 공개 사과했다.
아스널 팬 사이트 ‘Arsenal Fan TV’는 경기장을 찾았던 서포터스의 인터뷰 영상을 올렸다. 대부분이 분노를 참지 못했다.
“난 호주에 출장을 갔다가 24시간을 비행해 런던에 왔다. 경기 티켓도 300파운드(약 52만 원)였다. 그런데 난 망신을 당해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반면 첼시의 주제 무리뉴 감독은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딱 10분 후에 우린 정말 편하고 쉬운 경기를 봤다”는 말로 ‘불난’ 아스널에 부채질을 가했다. 무리뉴 감독은 경기 종료가 이뤄지기도 전에 서둘러 벤치를 떠났다. 해석이 분분했다. 워낙 사이가 좋지 않은 웽거 감독과 멋쩍은 대면을 하고 악수를 피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유력했다. 모두 아니었다. 기자들이 조기 퇴장의 이유를 묻자 “빨리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서 경기 스코어를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아스널은 첼시전 대패와 함께 정규리그 4위에 머물며 선두 첼시와의 격차가 승점 7까지 벌어졌다. 올 시즌도 사실상 우승이 어려워졌다. 마지막 우승의 영광을 맛본 건 2005년 FA컵 무대였다. 시즌 초반만 해도 리그 선두를 달리던 아스널이었지만 따스한 봄이 다가오며 팀은 하향곡선을 그렸다.
영국 언론들도 부정적인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대중지 데일리메일은 “웽거 감독은 부임 후 첫 500경기에서는 프리미어리그 트로피 3개와 FA컵 트로피 4개를 클럽 전시장에 가져다 놓았지만 이후 500경기에서는 전혀 결과가 없었다”고 꼬집었다.
일각에선 웽거 감독이 2년 뒤 클럽을 떠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아스널의 장기 계약 제시를 웽거 감독이 거부했다는 것이다. 물론 아직 모든 희망이 꺾인 건 아니다. 아스널은 2013~2014 FA컵 4강에 올라 위건(챔피언십)과의 대결을 앞두고 있다. 꺼져가는 불씨를 아스널이 다시 지필 수 있을까.
런던(영국) | 허유미 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