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한봉 감독, 주전자서 올림픽 금메달까지…청춘 다 바친 태릉 어찌 잊겠어요

입력 2017-09-29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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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릉에서 흘린 땀방울은 금메달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안한봉 감독은 19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세계무대의 높은 벽을 뚫고 그레코로만형 57kg급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연장 접전 끝에 우승을 확정짓고 기뻐하는 안한봉. 스포츠동아DB

■ ‘레슬링 영웅’ 안한봉의 추억

고 2때 입소, 선배들 빨래에 마사지까지
엄마가 쥐어 준 2만7000원 생각하며 견뎌
삼시세끼 궁중음식·뷔페, 덕분에 힘 붙어
선배들과 스파링땐 코피 쏟아가며 혈전

88서울올림픽 선발전 탈락 후 한동안 방황
지옥같은 4년후 바르셀로나 금메달로 효도
선수로 들어와 코치·트레이너·감독까지
태릉선수촌 없어져도 종종 와보려고 해요


1966년 6월 대한민국 스포츠의 요람이 탄생했다. 1965년 11월 착공한지 7개월여 만에 엘리트체육의 산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 공릉동의 사적 201호 태릉 옆에 들어선 선수촌이다. 이후 태릉선수촌을 거쳐 간 2만여 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은 2016리우올림픽까지 역대 하계올림픽에서 금메달 90개, 동계올림픽에서 26개 등 모두 116개의 금메달을 따냈다.

아시안게임과 세계선수권에서 따낸 메달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우리가 세계 스포츠강국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태릉선수촌에서 태극전사들이 흘렸던 굵은 땀방울과 노력의 덕분이었다. 한국 스포츠의 요람이었던 태릉선수촌은 이제 제 역할을 다하고 기억 저편으로 퇴장한다.

새 선수촌은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에 들어섰다. 세계 최대규모의 종합훈련장으로 태릉선수촌보다 3∼5배 큰 규모다. 9월 27일 개장한 진천선수촌은 대한민국 엘리트 체육의 새로운 100년을 열어갈 것이다.

바통을 물려줄 태릉선수촌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영원히 국민들과 태극전사의 마음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51년간 그 속에서 만들어진 땀과 눈물의 스토리는 언제까지나 추억되고 기억될 것이기에 그렇다. 태릉에서 청춘을 다 보낸 안한봉(49·삼성생명) 전 레슬링대표팀 감독, 선수로 감독으로 태릉을 경험했던 허정무(62)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 태릉의 전설로 회자되는 허재(52) 대표팀 감독으로부터 옛 선수촌의 추억을 들어왔다. <편집자 주>

안한봉 감독. 스포츠동아DB


까까머리 고등학교 2학년 때였죠.

1985년 10월 국가대표 훈련파트너 자격으로 태릉선수촌에 입소했어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해요. 잠시 전라남도 해남의 고향집에 머물다 입촌날에 맞춰 상경하려는데, 엄마(김정심·84)가 버스터미널에서 몸빼바지 호주머니를 뒤적이시더니 고깃고깃 지폐 몇 장을 쥐어주시더라고요. 내거 엄마 뱃속에 있을 때 배의 사고로 돌아가신 아빠 대신 저를 홀로 키워준 엄마가 새벽시장에서 낙지를 팔고 번 돈이었어요. 2만7000원. 함께 주신 가방에는 유명 메이커 트레이닝복과 양말 10켤레가 들어있었죠.

“힘들면 그냥 내려와!” 해남에서 광주 찍고 서울로 향한 버스에서 펑펑 울었죠. 강남 터미널에서 택시 타고 “선수촌 가자”고 했더니 기사가 1986서울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 공사현장에 내려주시더라고요. 부랴부랴 다시 태릉으로 갔는데 한밤중이었죠. 오후 5시까지 들어오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들어갈 용기가 없어 우두커니 선수촌 정문에 앉아있는데, 순찰하던 경비 아저씨가 자초지종을 듣곤 절 받아주셨죠.

도착해서요? 어휴, 대단했죠. 당시 훈련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거든요. 선배들 빨래며, 마사지며 전부 제 담당이었죠. 혹시라도 선배 쫄쫄이에 세탁용 세제라도 조금 묻어있으면 그냥 죽음이죠. 호칭은 딱 하나였어요. “어이, 꼬맹이!” 기합도 많았어요. 하루 1번은 집합이 걸리니까.

입촌 첫 주는 잠도 거의 못자고 손빨래만 했던 것 같아요. 매트 청소도 직접 하는데, 물론 제 담당이죠. 물 주전자는 말할 필요 없는 거 알죠?

새벽 6시 기상해서 훈련을 하고 모든 청소까지 마치고 숙소 방(올림픽의 집)에 들어오면 자정 무렵이었죠. 몇 번인가 탈출하려 했어요. 그런데 짐을 다 싸고 방문을 나서렬 때마다 2만7000원이 떠오르데요. 엄마 몸빼 바지 속의 구겨진 돈. 그래서 이를 악물었어요. 체육관(월계관)에서 훈련하고 운동장 뛰고, 산악훈련이며 외줄타기까지 낙오되지 않으려고, 꼴찌 면하려고 입에 거품을 물고 뛰었어요.

안한봉 감독(왼쪽에서 세 번째). 스포츠동아DB


식사시간은 정말 행복했어요. 시골에서 많이 못 먹고 운동만 하던 촌놈이 삼시세끼를 전부 궁중음식, 뷔페로 해결했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닭다리에 함박, 비프스테이크까지. 어떻게 되냐고요? 본래 체급이 48kg였거든요. 그런데 1년여 만에 52kg로 늘었어요. 감량은 이미 불가능했고.

덕분에 힘도 꽤 붙었죠. 어리고 약해 보이니까 선배들이 자주 파테르(그라운드 엎드리는 자세)로 절 놀렸어요. 계속 자신을 굴려보라고. 산만한 형들을 어떻게 굴려요. 그래서 화가 난 나머지 등짝을 세게 찍어줬는데, 먼지 나도록 맞았어요. 선배들과 스파링을 하다가 콧대도 많이 부러뜨렸죠. 당연히 그날은 집합이죠. 가장 친한 친구 박장순(레슬링대표팀 자유형 감독)이 ‘제발 사고 치지 말자’고 신신당부했지만 하다 보면 악바리처럼 붙게 되는데 어떻게 해요. 물론 저도 많이 코피를 흘렸죠. 그 상태로 더욱 강하게 달려들어요. 선배들은 기겁하고, 매트며 유니폼과 온 몸에 제 피를 묻히고. 물론 그 빨래는 제 몫이죠.

태릉선수촌에서 가장 싫은 날이 있어요. 비오는 날. 다른 종목들은 ‘우천 관계로 종목별 훈련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전부 환호하는데 저희는 푹푹 빠지는 운동장을 돌고 또 돌았어요. 옷도 많은데 운동화까지 빨아야 하잖아요. 선배가 30명쯤 있었는데 신발 60개를 혼자 빨아요. 탈수기는 1대인데, 잠을 잘 수 있겠어요? 제발 비 오지 말라고 기도 많이 했죠.

청춘남녀의 로맨스? 솔직히 전 인기가 없었어요. 축구, 농구 선수들이 최고였죠. 탁구 유남규(삼성생명 감독)가 선수촌 동기인데 황태자였어요. 여자 선수들은 난리 나죠. 그 녀석이 멋진 차를 몰고 온갖 인기를 누릴 때 제 손은 핸들 대신 주전자를 잡고 있었으니, 황제와 하인이 딱 맞아요.

1986년 세계주니어선수권, 시니어 세계선수권 출전이 첫 국제무대 도전이었는데 여전히 막내였어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도 온갖 심부름을 다했죠. 전지훈련 열흘 내내 심부름을 하고 대회에 나갔어요.

그래도 동네에서는 영웅이었어요. 선수촌에서 하루 수당 1000원 정도 줬어요. 그걸 모아서 훈련복 사고, 노란색 미니 카세트를 샀죠. 큰 헤드폰에 빨간색 예쁜 운동화까지 신고 고향마을을 한 바퀴 뛰면 동네 꼬맹이들이 함께 뛰어요. 그림 그려지죠? 꼬맹이가 꼬맹이들을 달고 뛰는.

1988서울올림픽은 마음 아프죠. 국가대표 최종선발전에서 미묘한 판정으로 탈락한 뒤 한동안 방황했어요. 메달 따서 엄마 몸빼 바지에 포상금 넣어드리겠다는 꿈이 물거품이 된 거죠. 잠시의 방황 끝에 돌아온 태릉선수촌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는데, 함께 웃을 수 없었어요. 주인공이 아니니까요.

다행히 마음을 금세 고쳐먹었죠. 지옥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19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았어요. 엄마한테 효도도 했고.

박장순 감독-안한봉 감독(오른쪽). 스포츠동아DB


아, (박)장순이 이야기를 하려고요. 저보다 3년 늦게 선수촌에 왔는데 친구니까 저는 막내의 부담을 나눌 수 있다는 생각에 마냥 좋았죠. 그런데 이 놈이 친구를 골탕 먹이네요. 선배들이 자기한테 맡긴 심부름이며 빨래를 몰래 제 몫으로 떠넘기는 거죠. 그런데 꼬리가 길었어요. 선배들한테 딱 들통이 나 끌려갔는데 엄청 맞았을 거예요. 한 번은 엄마가 없는 살림에서 큰 뱀을 고아 보약을 해주셨는데, 전 개수를 확인한 상태였거든요. 그런데 한 봉지씩 없어지는 거죠. 하루는 냉동고 뒤에 숨어 있었어요. 범인 잡으려고. 역시 장순이였어요. 한 봉지 몰래 뜯을 때 목덜미를 낚아챘죠. 보상은 오소리 보약이었어요. 자기 아버지가 보내 주셨다며. 그래도 어찌 뱀과 오소리가 같나요?

핸드볼, 수영, 싱크로나이즈드 여자선수들에게 관심은 많았죠. 그 분들은 야수 같은 저희를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우린 좋았어요. 장순이랑 제가 짝사랑한 선수들을 합치면 50명은 족히 넘을걸요. 다만 당시 함께 인기가 없던 유도 선수들이 제가 지도자가 됐을 때 인기순위에 오르더라고요. 시대가 바뀌었나요? 아니면 외모 기준이 바뀌었나요?

안한봉 감독이 품고 있던 추억의 태릉시절 사진들. (위쪽부터) 1989년 여름 태릉선수촌 월계관에서 레슬링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는 김성집 전 대한체육회장(가운데). 1990년 8월 월계관에서 김준성 태릉선수촌 선수총괄 체력담당위원(왼쪽)과 카메라 앞에 선 안한봉. 1996년 5월 올림픽의 집(남자선수단 숙소) 자신의 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안한봉. 사진제공 | 안한봉 삼성생명 감독


그렇게 하루하루 시간이 흐르다보니 대표팀 트레이너가 되고, 또 코치가 되고, 감독까지 했어요. 소속 팀 숙소보다 태릉선수촌에서 보낸 시간이 훨씬 길었죠. (대표팀을 잠시 떠난) 2008베이징올림픽∼2010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4년을 제외하면 줄곧 태릉에서 생활했어요. 2000년 시드니대회 때는 코치로, 2004년 아테네와 2012년 런던 또 2016년 리우는 감독으로 올림픽을 누볐고. 태릉선수촌이 사라지니까 당연히 가슴이 아리죠. 추억이 통째로 날아간 느낌? 죽는 날까지 어떻게 잊겠어요. 여기가 없어져도 종종 와보려고 해요. 태릉선수촌이 어떻게 변할지 몰라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곁을 지켜줄 거예요.

정리 |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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