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항공 박기원 감독, ‘우승 이후의 한국배구’를 말하다

입력 2018-05-04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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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박기원 감독은 1969년 창단한 팀에 처음으로 V리그 트로피를 안겨줬다. 박 감독은 훈련량을 줄이는 대신 선수들에게 자율을 부여했다. “감독은 군림하는 존재가 아닌 도와주는 존재”라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67)은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나타났다. 어쩌면 늙고 젊음은 육체적 연령이 아니라 생각의 유연성으로 정의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한항공 배구단은 1969년 창단됐다. 단 한 번도 큰 대회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이랬던 팀에 최초의 V리그 챔피언이라는 별을 달아줬다. 박 감독의 어떤 ‘비범함’이 대업을 성취시켰을까? 박 감독의 생각은 좁게는 한국배구, 넓게는 한국 사회 전반에 좋은 영향력을 끼칠 수가 있을 터다. 그의 이야기를 경청할 가치가 여기에 있다.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왼쪽). 스포츠동아DB



● 어떻게 대한항공은 우승을 할 수 있었나?

배구계에서 대한항공은 ‘훈련 적게 하는 팀’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게다가 2017~2018시즌 박 감독은 수비훈련에 관해 선수들에게 전권을 줬다. 이런 관리로 성공하자 ‘대한항공처럼 멤버가 좋은 팀이나 통할 수 있는 일’이라는 평가절하도 나왔다.

박 감독은 “선수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지도자는 선수에게 과제를 줄 뿐이다. 이를 해결할 최적의 경로는 선수 스스로 찾는 것이다. 감독은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라 (선수가 필요로 여길 때) 도와주는 존재”라고 소신을 말했다. 선수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면 소통이 필수다. ‘유럽 마인드’를 지닌 박 감독은 이 지점에서 여느 지도자와 다르게 능숙하다. 가치관을 주입하지 않고, 잘 들어주는 것이다. 박 감독은 “소통은 후보선수 얘기라도 듣는 것”이라고 말했다.

박 감독은 배구계의 오랜 관행인 합숙도 사실상 폐지했다. “합숙하지 않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했다. (집에 보내니) 선수들이 심리적으로 새로워지는 효과가 크더라. 감독이 불안하니까 훈련을 많이 시키려드는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대한항공은 2017~2018시즌 슬로스타터의 팀이었다. 가뜩이나 박 감독은 계약 마지막 시즌이라 레임덕이 가속화될 수 있었다. 그런 절망적 상황에서도 팀이 흔들리지 않은 것은 감독을 향한 선수들의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 감독은 “자유와 책임은 강팀이 아니라 약팀에서도 통할 수 있는 방식이라고 믿는다”고 강조했다.

아직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지만 박 감독은 2018~2019시즌에도 팀을 맡을 것이 확실하다. 대한항공 사상 첫 재계약 감독이 될 수장은 “계속해서 변화를 줄 것이다. 다음 시즌 대한항공 배구는 새로운 드라마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단 하나의 진심, 평생 배구 현장에 남아있고 싶다

박 감독은 중 2때 배구를 시작했다. 늦게 시작했음에도 소질이 있었다. 고 2때 국가대표까지 됐다. 레프트와 센터 포지션을 넘나들었다. 이런 잠재력을 유럽에서 눈여겨봤다. 빅리그라 할 이탈리아리그로 스카우트됐다. 그곳에서 선수부터 시작해서 코치와 감독까지 올라갔다. 이탈리아 클럽팀 감독으로 경험을 쌓은 박 감독을 이란 배구가 불렀다. 지금은 아시아에서 최강으로 평가되어도, 당시 이란은 실력보다 잠재력의 팀이었다. 이런 이란 배구의 토대를 만든 이가 박 감독이다. 이란 사령탑으로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그렇게 얻었다. 당시 금메달은 한국이 차지했다.

박 감독은 한국배구로 금의환향했다. V리그 LIG 감독으로 영입됐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유럽 배구 방식만 옳다고 믿던 시절이었다. 그 다음에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던 덕분에 한국 배구를 알게 됐다. 두 가지 배구를 접목해 대한항공에서 나의 배구를 완성했다.”

2016~2017시즌을 앞두고 대한항공과 계약할 때, 박 감독은 대표팀 감독 신분이었다. 이런 탓에 세간의 비판도 받았다. 그러나 당시 대한배구협회가 박 감독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조건이 열악했다. 박 감독은 “무급 봉사에 가까운 세월”이라고 그 때를 떠올렸다. 결과적으로 그러나 그런 시행착오와 아쉬움의 시간이 있었기에 박 감독의 배구는 새 경지에 들어설 수 있었다.

박 감독은 그 누구보다 삼성화재 신치용 전 단장을 인정한다. 다만 신 단장의 방식이 한국배구에서 유일한 진리라곤 믿지 않았다. 그런 맥락에서 대한항공 배구의 성공은 첫 우승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제 박 감독은 대한항공의 미래를 본다. “팀 안에서 지도자를 육성해야 된다. 그것을 만드는 것도 나의 일”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단기성적에 급급했다. 그러나 우승 갈증이 풀리자 팀에 시스템을 만들 안목의 여유가 생겼다.

박 감독의 마무리는 어떻게 될까? “(감독직에서 내려온 다음에) 직함은 관계없다. 대한항공이든 어느 팀이든 필요하다면 팀을 도울 수 있는 자리라면 된다. 행정은 관심 없다. 현장만 지키고 싶다. (현장 지원과 전력 운영만 관할하는) 총괄 디렉터 같은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대한항공 박기원 감독. 사진제공|KOVO



● 정상에 올라와보니 산악인 박영석의 마음을 알겠다

박 감독은 한국배구의 기대주 임동혁(19)을 라이트로 육성할 방침이다. 원래 레프트 자원으로 생각했지만 한국배구의 미래를 위해 생각을 바꿨다. 문성민(현대캐피탈) 이후 한국배구를 대표할 라이트 자원이 필요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한국배구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이 절실하다. 국제통인 박 감독은 대표팀을 위해 선수 차출에 관한 전폭적 협력을 약속했다. 국제배구연맹 슈퍼바이저 자격으로 직접 인도네시아로 가서 대표팀을 물심양면 도울 각오다.

박 감독은 한국배구를 위해 대한배구협회의 행정능력 각성과 현장 지도자들의 공부를 당부했다. “특히 여자배구 지도자들은 공부해야 한다. 김연경만 없으면 선수 200명인 저변을 가지고 세계와 싸울 수 있겠나”라고 지적했다.

박 감독은 뚜렷한 취미가 없다. 취미도 배구다. 그토록 좋아하는 배구가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그 스트레스는 상상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대한항공 내부에서 박 감독을 끝까지 믿어줬던 덕분이었다. 박 감독이 한국배구연맹(KOVO) 시상식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 소감에서, 대한항공 이유성 단장에게 감사를 전한 데에는 그런 고마움이 담겨있다.

마지막 소원인 우승을 했어도 박 감독의 배구는 마침표가 아니다. 박 감독은 “산악인 박영석은 모든 산을 다 올랐다. 그럼에도 산으로 또 올라갔다. 그 마음을 이제 나도 알 것 같다”고 말했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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