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인 안향 선생의 고향인 영주 순흥 조성한 선비문화 테마파크 선비촌. 영주 선비들이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수더분하다’는 표현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성질이 까다롭지 아니하여 순하고 무던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대개는 사람의 성품에 쓰는 표현이지만, 여행지 중에도 이런 수더분한 매력을 가진 곳들이 있다. 시끌벅적한 전국구급 유명세의 공간이거나, 한번에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비주얼은 아니지만 언제 가도 늘 마음 부담이 없는 편하고 은근한 매력을 가진 그런 지역이다.
이번에 5월 봄비를 맞으며 1년 만에 찾은 경북 봉화와 영주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수더분한 멋’을 지닌 고장이다. 지역 곳곳에 꽤 볼만한 관광명소를 여럿 지니고 있지만, 고장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들뜨거나 요란하지 않다. 영남 선비 문화의 꼿꼿한 기개가 여전함을 느낄 수 있고, 오랜만에 놀러간 고향이나 시골 어르신의 집같은 정겨움이 있다. 정신 사나운 ‘오버 투어리즘’의 관광지 분위기에 질렸다면 ‘여행 디톡스’로 가볼만한 곳이다.

봉화 물야면 오전약수관광지. 조선 성종 때 보부상이 처음 발견한 약탄산 약수로 위장병과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봉화는 태백산맥이 가로지르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고장이다. 한때는 인구가 12만 명을 웃돌았지만 지금은 채 3만 명이 안된다고 한다. 지역 대부분이 평탄한 지형이 아닌 꽤 험준한 산골과 계곡이어서 예전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다. 그래서 과거에는 등짐을 지고 인근 박달령 등 높은 산을 넘나들던 보부상들에게 생필품 유통의 상당 부분을 의지했다.

봉화 오전약수관광지 약수터에 있는 보부상 조각. 예전 이 지역 생필품 유통을 박달령을 넘나드는 보부상이 책임졌는데, 오전약수도 보부상이 발견했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1985년 관광지로 지정되어 지금은 매년 30여만 명이 찾는 봉화의 인기 명소이다. 지자체에서 보부상 조형물도 세우고 이런저런 공원화 작업을 통해 가꾸었지만, 다른 곳에 비해서는 덜 요란스럽다. 그런 소탈한 모습이 오히려 계곡 등 약수터 주변 자연 경관을 거스르지 않아 숲길을 걷는 재미가 있다.

오전약수는 가볍게 톡 쏘는 탄산 덕분에 청량감이 있다. 다른 지역의 비슷한 약수와 달리 탄산이 강하지 않아 계곡을 거슬러 산책한 뒤 한 모금 마시기 좋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오전약수관광지를 돌아다니다 보면 ‘외씨버선길’이라는 표지가 눈에 띤다. 청송, 영양, 봉화, 영월 등 산세가 깊은 인근 네 지역을 연결한 도보여행길이다. 오전약수관광지는 외씨버선길 중 제 10길(약수탕길) 코스의 한 곳이다. ‘외씨버선길’이란 이름은 길을 구성하는 네 고장을 이으면 조지훈 시인의 ‘승무’에 나오는 외씨버선처럼 보인다고 붙은 이름이다.

봉화 오전약수관광지의 계곡 산책길. 오전약수관광지는 외씨버선길 중 제 10길(약수탕길) 코스의 한 곳이자 동서트레일 47구간 거점마을이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봉화 오전약수관광지의 화덕피자맛집 봉화객주카페. 관리사무소를 리모델링했는데, 간판에 ‘외씨버선길’의 픽토그램이 있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미슐랭 그린 가이드로부터 1스타를 받은 풍경 맛길 35번 국도. 봉화 청량산과 안동 도산서원을 잇는 길이다 사진제공 |봉화군
35번 국도는 봉화 청량산과 안동 도산서원을 잇는 길이다. 경북 내륙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지방 도로였지만 주변 경관이 빼어나 드라이브 명소로 알음알음 입소문을 탔다. 결정적으로 여행정보를 소개하는 ‘미슐랭 그린 가이드’에서 이 길에 1스타를 부여하면서 유명해졌다.
낙동강을 향해 흐르는 운곡천을 따라 이어지던 길은 훌쩍 산속으로 방향이 바뀌는데, 고개를 거진 올라갈 때쯤 범바위 전망대가 나온다. 봉화여행의 추억사진을 찍고 싶다면 이곳이 1티어 명소다.

봉화의 떠오르는 사진 명소 범바위 전망대의 호랑이 조형물. 황우산을 감아 흐르는 낙동강 줄기를 내려다보는 절벽 위에 작은 전망 데크를 조성했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봉화 범바위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낙동강 줄기. 황우산을 감아 돌아 운곡천과 만나는 낙동강시발점 테마공원까지 이어지는 물길이 눈에 들어온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낙동강시발점 테마공원의 명호 이나리출렁다리.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 지류가 운곡천과 만나는 합수머리에 있는데 물살이 힘찬 래프팅 명소이기도 하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예던길의 명물 선유교. 예던길은 퇴계 이황은 10대 시절 숙부에게 글을 배우기 위해 집과 청량산을 오갔던 길이다 사진제공 |봉화군

봉화 정자문화생활관의 메인 전시관인 누정전시관 전경. 103좌에 이르는 누각과 정자가 있는 봉화군의 특성을 살려 2020년 문을 연 국내 유일의 누각 정자 테마 전시관이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봉화에는 유난히 누각과 정자가 많다. 그 수가 무려 103좌라고 한다. 봉화가 우리나라 누정(누각과 정자) 문화의 중심지라고 자부하는 이유기이기도 하다. 2022년에는 16세기에 지어진 청암정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하는 등 전국에서 누정이 가장 많고 또 잘 보존되어 있다. 이런 지역 특징을 살려 2020년 봉성면에 봉화정자문화생활관이 문을 열었다. 이곳은 국내 유일 누각과 정자를 테마로 한 전시관이다.

봉화 정자문화생활관의 메인 전시관인 누정전시관 내부. 누정의 개념과 특징 부터 건축 구조 및 원리, 누정산수화와 문학 등 누정에 대한 모든 것을 소개하고 있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봉화 정자문화생활관의 야외정원. 봉화의 청암정 석천정자를 비롯한 전국의 대표 정자를 그대로 재현해 배치했다 봉화|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봄비 맞으며 거닐은 호숫가와 고택들
봉화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인 영주에는 압도적 풍광을 자랑하는 부석사나 영남 선비 문화의 정수인 소수서원 같은 명소가 있다. 하지만 5월 정취를 돋구는 봄비 맞으며 찾은 이번 여행길는 가급적 친숙한 ‘전국구’ 관광지가 아닌 곳을 최대한 찾아다녔다.

영주댐 건설로 만들어진 인공호수인 영주호에 조성한 용마루 공원. 산책로와 정자, 옛 기차역인 평은역, 기념비 광장 등이 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 용마루 공원은 영주댐 건설로 마을이 수몰되면서 생겨난 섬들을 잇는 용미과 용두교, 두 개의 다리가 특징이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 용마루2공원의 용두교. 길이 150m의 현수교로 출렁다리 형식이지만 바람이 세기 부는 날을 제외하고는 평소는 흔들림이 그리 크지 않아 쉽게 건널 수 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 순흥의 선비촌은 선비들이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재현한 테마파크다. 선비 정신을 담은 수신제가, 입신양명, 거무구안, 우도불우빈 등 네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 선비촌의 고택. 원래 이곳에 있던 집이 아닌 김상진 가옥, 해우당 고택, 인동장씨종택, 두암고택, 김문기가, 만죽재 등 유명 고택을 실제 모습 그대로 재현해 지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아이와 함께 가면 좋은 생태교육 현장
순흥면에는 국립공원공단이 운영하는 여우생태관찰원이 있다. 토종여우는 우리나라의 멸종 위기 야생동물 1급이다. 여우는 개과 동물 중에는 중간 크기에 속하며 잡식성으로 수명은 약 3~6년이다.

영주 여우생태관찰원 실내 전시관. 아이들도 자연 생태계의 특성과 여우 보존의 중요성을 쉽게 이해할수 있도록 어린이 눈높이에 맞춰 교육시설을 조성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 여우생태관찰원에서 보호중인 토종 붉은여우. 덫에 걸려 한쪽 다리가 불구인 탓에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어려워 관찰원에서 보호하고 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현재 여우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며 소백산에서 시작해 백두대간을 따라 설악산과 지리산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여우복원사업은 원종 확보 및 증식, 야생적응훈련, 방사 등의 과정을 통해 생태계 건강성 및 지속성을 확보하고, 생물종다양성 증진과 멸종위기종 복원사업의 기틀 및 관리기반 마련을 목표로 한다.
여우생태관찰원은 관리동과 홍보동으로 이루어졌고, 하루 3회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전문해설사와 함께 생태학습장을 탐방할 수 있다. 전국에서 구조해 야생에 방사해 키우고 있는 여우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주 여우생태관찰원에서 보호중인 토종 붉은여우. 멸종 위기 야생동물 1급으로 이곳에서 종족 보존과 증식, 야생적응훈련, 보호 등을 실시하고 있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영주]여전히 고즈넉한 정취의 나무다리
강물이 산에 막혀 돌아 흐르는 것을 물돌이동이라고 하는데, 낙동강 유역에 꽤 많이 있다. ‘물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의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감아 도는 물돌이동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영주 무섬마을을 상징하는 좁은 나무다리. ‘물위에 떠 있는 섬’이라는 뜻의 문수면 수도리 무섬마을은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마을을 감아 도는 물돌이동의 대표적인 명소이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가 처음 터를 잡았고, 이후 선성 김씨가 들어오면서 현재는 두 집안의 집성촌이다.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으로,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다양한 구조와 크기의 전통 가옥을 만날 수 있다. 특히 경북 북부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많다. 반남 박씨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만죽재를 비롯해 9채가 경북문화재자료와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됐다.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된다.

무섬마을의 백사장을 가로지르는 길게 굽은 나무다리. 영주 여행의 인증샷 명소다. 무섬마을은 반남 박씨와 선성 김씨 집성촌으로 자연과 어우러진 전통 마을의 모습을 잘 간직한 곳이다 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봉화·영주|김재범 기자 oldfie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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