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잔잔한 날의 항해. 평화롭게 보이지만 배 안에서는 적어도 4명의 대원들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종하고 있다. 백조가 우아하게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요란하게 물갈퀴질을 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 이정식 스포츠 포토그래퍼
2.내 청춘의 격렬비열도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 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중략>…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우리는 뱃놈, 저 냥반들은 뱃냥반”
외파수도 앞바다에서 익수자 구조 훈련을 하고 있던 중 빈 바다에 난데없는 확성기 소리가 울려 퍼진다. 돌아보니 언제 왔는지 10여명의 낚시꾼들을 태운 낚싯배 한 척이 떠 있었고 확성기를 잡은 사람은 선장이었다.
“담궈”와 “빼”, 단 두 마디로 낚시꾼들을 지휘하던 그는 틈만 나면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다.
“아따, 그림 좋습니다.”, 혹은 “그런 배는 무지허게 비싸겄소.”
‘놈’과 ‘양반’….
낚싯배 선장에겐 악의가 없었지만 바다가 생활 터전인 어민들에게 돛단배로 스쳐가는 우리들이 어떻게 비쳐질지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항해에 나선 이후 느낀 세일링 요트에 대한 오해 중 하나가 럭셔리, 사치 이미지다. 대중에 투영된 요트는 하나같이 일광욕을 즐기는 비키니 미녀, 호화로운 선상 와인파티로 요약된다.
하지만 그건 엔진으로 달리는 호화 파워요트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바람으로 달리는 세일링 요트는 고난과 도전의 연속인 익스트림 스포츠다. 파도를 뒤집어써가며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시트를 조정해야하고 헬멧과 안전벨트를 착용해야 할 만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더구나 집단가출호처럼 영해의 외곽선을 도는 장거리 항해인 경우 하루, 적어도 10시간 이상 바다와 겨뤄야하므로 고도의 체력과 집중력이 요구된다. 배 안엔 쉴 곳이라야 야전침대 크기의 침상 몇 개뿐이고 그나마 침상에 누웠다 해도 파도가 치면 온갖 물건들과 함께 굴러 떨어지기 일쑤다.
물론 바람결의 미묘한 변화를 읽고 찾아내 바람처럼 달리는 스릴과 낭만이 있지만 한 번 항해가 끝나면 체중이 1~2kg씩 빠지는 것을 막을 순 없다.
격렬비열도를 향하는 126km의 바닷길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우릴 괴롭힌 것은 무풍과 작렬하는 7월의 땡볕, 그리고 13시간이라는 긴 항해시간이었다. 전곡항에서 격렬비열도까지는 태안반도에 바짝 붙어가야 거리를 줄일 수 있지만 수심이 얕고 그물 등 어구가 많은 탓에 서쪽으로 울도 수역까지 간 후 남하하는 항로를 택했다.
잠을 설치고 새벽 4시에 모인 대원들이 연신 하품을 하며 항해를 시작한지 두 시간 쯤 후 해가 떴고 기온은 빠르게 상승했다. 옹색한 갑판엔 바닷물을 끓여버릴 듯 작렬하는 태양을 피할 곳이 없었다. 선실에선 식사당번 김은광(41)이 아침을 짓느라 팥죽 같은 땀을 쏟았다. 유도선수 출신으로 몸집이 깍짓동인 그에게 돛단배의 선실 부엌은 너무 좁았다.
정오를 넘기자 전날 잠을 거의 못 자 피로가 쌓인 크루들은 컨디션 난조에 빠졌다. 가도 가도 끝없는 수평선이다. 남-북반구가 갈리는 적도에는 바람이 없는 돌드럼스(Doldrums·열대무풍지대)가 있는데 여기에 갇혀 며칠씩 꼼짝을 못하면 거의 정신분열 단계에까지 이른다고 한다.
집단가출 대원들은 시간이 갈수록 말수가 적어졌고, 오후가 되자 몇몇은 급기야 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돛단배에게 바람 없는 바다는 사막에 다름 아니고 우리는 끝없는 모래언덕을 터벅터벅 걷는 낙타였다.
서해의 섬 중 육지에서 가장 먼 격렬비열도는 해도상에만 표시되어 있는 신기루였고 시간이 갈수록 우린 건조대에 널린 생선처럼 바싹 바싹 말라갔다. 오아시스처럼 초록색으로 빛나는 격렬비열도가 육안으로 보인 것은 출항한지 11시간 가까이 지난 오후 5시였다. 그로부터 2시간을 더 달려 오후 7시 북격렬비도에 상륙하며 대원들은 감격했다.
아! 단단하고 움직이지 않는 땅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
상륙하는 동안 섬의 주인인 갈매기들은 요란스레 울어대거나 위협적인 저공비행으로 경계했다. 대피소와 기상관측소, 등대가 있는 북격렬비도는 몇 년 전 등대가 무인시스템을 갖춘 이후 무인도가 된 상태다. 13시간 만에 땅을 디딘 대원들은 곧 기운을 차려 저녁 찬거리 마련에 나섰다.
집단가출호 항해에서는 쌀 등 기본 음식 외엔 현지에서 직접 재료를 구해 먹는 것이 원칙이다.
무인도엔 가게는 물론 민가도 없어 반찬이 뭐가 될지는 낚시 결과에 따라 달라진다.
낚시에 실패하면? 당연히 김치 한 가지에 밥을 먹어야한다.
다행히 ‘부식 추진조’는 30여 분만에 놀래미와 참돔 몇 마리를 낚아 찌개를 끓일 수 있었다. 저녁을 먹는 동안 달이 떠올랐다. 물결에 일렁이는 달빛이 서해의 끄트머리를 지키느라 고달픈 섬을 쓰다듬었고 갈매기들도 날갯죽지에 머리를 접어 넣은 채 고요히 밤을 맞아들였다.
별똥별이 꼬리를 길게 늘이고 수평선으로 잠겨드는 가운데 등대가 아득한 바다 안개를 스크린 삼아 빛의 기둥을 휘저을 때 허 선장은 숭늉 그릇을 옆에 둔 채 수첩과 펜을 꺼내 스케치 삼매경에 빠져들었다.
“ …창밖에는 밤새 눈이 내려/ 그 하얀 ¤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했지…” <박정대 詩, ‘내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같은 눈이 내리지’>
그러나 7월의 격렬비열도엔 음악 같은 눈 대신 아침부터 격렬하게 뜨거운 햇살이 내렸다. 섬을 떠나기 전 대원들은 갯바위에서 펭귄처럼 바다로 뛰어들었다. 수심 7~8m까지 유리처럼 훤히 들여 다 보이는 바다는 차고 맑아 몸에 쌓인 열기를 말끔히 걷어내 상쾌하게 길을 떠날 수 있었다.
격렬비열도 동쪽으로 석도, 우배도, 병풍도, 난도, 궁시도 등 눈부신 자태의 무인도들이 점점이 이어져 우린 섬에 근접해 스쳐가는 항로를 설정했다. 궁시도가 시야에서 멀어질 즈음 남서풍이 살아나 남쪽으로 비팅(바람이 불어오는 각도에 최대한 근사치로 전진하는 항해법)해 내려간다.
위도 상 대천쯤까지 남하했을 땐 바람에 제법 힘이 실려 있어서 남서풍을 뒤로 받아 스피네커(순풍용 돛)를 펼쳤다. 바람으로 선속이 7노트를 넘나들자 배는 활기를 되찾았다. 집단가출호의 일원인 아시안게임 요트 금메달리스트 정성안(39·여수시청)의 열정적인 세일링 현장 강의도 이어졌다.
점심때 맞춰 배 뒤에 그저 묶어놓은 낚시에 삼치 한 마리가 걸려들었다. 삼치 회덮밥을 기대하며 쌀을 듬뿍 안쳐 밥을 지었다. 그런데 웬걸? 뜸이든지 한참인데 고기가 더 이상 잡히질 않는다. 사람은 11명에 손질된 생선은 기껏해야 5~6인분. 낭패였다.
회덮밥은 결국 생선이 모자라 고추장을 잔뜩 부린 고추장 덮밥이 됐다.
9시간 가까이 달려 오후 7시 30분, 둥글고 단단한 자갈로 유명한 내파수도에 상륙했으나 야영할 곳이 마땅찮아 30여분 더 걸리는 외도로 발길을 돌렸다. 외도로 가는 길에 허기진 선원들이 생라면을 깨먹었다.
“이러다 선원들이 선상 반란 일으키겠다”며 특식을 제안한 것은 허 선장이었고, 외도 선착장 앞에 정박 중이던 어선으로부터 씨알 굵은 참돔 몇 마리를 구입한 것은 조종덕 대원이었다.
조 대원은 서울 서초동의 횟집 ‘잡어와 묵은지’의 주방장. 생선 전문가답게 번개처럼 회를 떴다. 깜깜한 밤중에 외도에 상륙한 선원들은 방파제에 둘러앉아 회가 접시에 채 담기기도 전에 된장에 찍어 허겁지겁 삼켰다.
외도의 아침은 부지런한 해녀 아주머니들의 물질 준비로 깨어났다. 50~60대의 해녀들은 방파제에서 비박한 우리들이 안쓰러웠는지 ‘아침 식사는 어떻게 하느냐’, ‘밤새 모기에 뜯기지는 않았느냐’며 살갑게 말을 건넨다. 해녀들이 키조개를 따기 위해 바다로 나갈 때 우리도 외도를 떠났다.
오후 2시, 천수만을 깊게 파고든 오천항 초입에서 모터보트로 마중 나온 이 지역 세일러 김철훈 씨와 조우했다. 한강 하구의 옛 모습을 연상케 하는 오천항에는 세일링 요트 10여대가 정박되어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김철훈 씨와 오천요트클럽의 배려로 앵커를 묶고 길었던 2차 항해를 마무리했다. 다음 항해는 오천항에서 외연도, 어청도를 짚어나가 목포까지 진출하게 된다.
아웃도어 칼럼니스트 송철웅
사진 | 이정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