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생애 최고의 경기] 김인식 고문 “KS 첫 우승… WBC보다 짜릿했지”

입력 2010-01-15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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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야구의 영원한 ‘스승’ 김인식 전 한화 감독. [스포츠동아 DB]

김인식 고문의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
《학창시절 친구들과 봤던 만화 ‘슬램덩크’에서 주인공 강백호의 대사가 떠오른다. 경기 중 부상, 감독의 교체 권유. 그러나 강백호는 단호하게 외친다. “감독님은 인생 최고의 순간이 언제였나요? 저는 지금입니다.” 복서 홍수환의 말처럼 누구에게나 한방은 있다. 그 ‘한방’을 스포츠동아가 추억하고 발췌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내 생애 최고의 경기.’ 자연스럽게 ‘우리시대의 명장’ 한화 김인식 고문이 1번 주자로 머릿속에서 설정됐다.》

솔직히 김 고문은 인터뷰하기 까다롭다. 말이 눌변이고, 모범답안만 나오기 일쑤다. SK 김성근 감독이 앉은 자리에서 5시간 야구얘기만 할 수 있는 정열가라면 김 고문은 야구얘기를 의도적으로 피하는 편이다. 오히려 김 고문은 야구 자체보다 야구로서 맺어진 인연을 말하는 걸 즐긴다. 이런 그이지만 ‘내 생애 최고의 경기’ 회고담은 예외인 듯했다. 김 고문은 2006년,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2000∼2001년, 2006년 한국시리즈,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등을 놓고 한참 망설이더니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을 꼽았다. (인터뷰는 최대한 육성을 살리되 필요한 부분은 설명을 넣었다.)


-어째서 그 경기를 베스트로 뽑았나요?


“아무래도 그 경기를 이겨서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했고, 여러모로 안 좋은 상태에서 OB를 맡아서 추스르는 과정에서 얻은 결과라 모두가 뜻밖이라 생각했지. 전부 ‘OB는 안 된다’고 했었으니까 그래서 더 값진 것 아니야?”(첫 우승, 그것도 선수이탈 파동에 휘말렸던 난파선 OB를 맡아서. 이 7차전 승리로 감독 김인식의 이력에 ‘우승 감독’ 훈장이 붙었고, 여기서부터 국민감독 김인식의 토대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7차전을 패한 롯데 김용희 전 감독과 김 감독의 이후 야구역정을 대조하면 그 한판의 무게감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15년 전인데 그날 일이 다 떠오르세요?


“아침부터 생각나지. 사실 전날 밤 기자들이 많이 찾아와 몇 차까지 마신 것 같아. 그 시절엔 담당기자들과 숙소도 같이 쓰고 그럴 때니까. 잠은 덕분에 잘 잤지. (7차전 걱정은) 전부 잊고 잤는지도 몰라.(웃음)”

-우승 이후 ‘인화의 야구’란 말이 나온 것 같아요.

“솔직히 극적으로 치자면 2006년 WBC 일본전(이종범이 결승타를 때린)이지.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왜 95년 7차전이냐, 전부 OB는 힘들다고 했거든. 갔을 때 나부터 망가진 팀이라고 봤어. 그런데 왜 수락했냐고? 갈 길이 거기밖에 없었거든. 우승은 기대도 못했지. 그런데 경기를 할수록 실력이 향상되는 기쁨을 느꼈어. 속으로 놀라웠어. 막바지에 연승으로 LG에 0.5경기 앞서 한국시리즈 직행을 했지. 나는 한국시리즈 우승보다 페넌트레이스 1위 확정 때가 더 기뻤어.”

숱하게 많은 경기들 중에서도 처음으로 ‘우승 감독’이란 호칭을 안긴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을 ‘내 생애 최고의 경기’로 꼽았다. 당시 OB 감독이던 그는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했다. [스포츠동아 DB]



-감독으로서 그 7차전 가장 강렬했던 장면을 꼽는다면요?

“꿈같았어. 6차전에 진필중을 깜짝 선발로 내서 이기고 김상진(SK 투수코치)을 7차전 선발로 통보했어. 사실 그날 상진이 컨디션은 안 좋았던 것 같아. 나만의 느낌일지는 모르겠는데 상진이가 이상하게 투수땅볼을 잡아서 1루에 악송구할 때가 종종 있었어. 그런데 마무리를 권명철로 맡겼고, 9회 마지막 아웃을 투수땅볼로 잡아냈잖아? 그때 마음 졸였던 거. 그때 김상진이었으면 어땠었을까, 아찔해.(웃음) 권명철이 땅볼을 잡아서 1루에 김형석에게 던질 때까지의 시간이 나에겐 굉장히 길었어.(웃음)”

-3회 롯데 2루수 박정태(현 롯데 2군 감독)의 알까기가 흐름을 바꿔놨지요.

“(강하게) 평범한 타구가 아냐. 겉보기와 달리 굉장히 어려운 타구였어. 타이밍 맞히기 어려운 바운드에 약간 불규칙도 있었던 것 같아. 덕분에 2점 났을 땐 이기겠다는 생각은 들었지. 결국엔 9회 끝까지 모르게 됐지만. OB가 우승하니까 직원들이 다 울었어. 나는 어리둥절해서 “왜 울어?”라고 했지만 맺혀있던 게 많았던 모양이야. 헹가래는 프로감독 돼서 처음이었지. 박철순 장호연 이명수 김상호 김민호…, 다 생각나더라고.”

-당시 고안한 위장스퀴즈 전술은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써먹더군요.

“고교에서 가르칠 때부터 생각했어. 프로에서는 평상시 아껴뒀다가 한국시리즈에서 써 먹은 거야.(웃음) 언론에서 사인미스라고 생각했는데 속으로 ‘계속 그렇게 착각해라’ 하고 있었지.(웃음)”


-그밖에 기억나는 경기, 반대로 가장 아쉬웠던 경기를 꼽는다면요?


“내용이야 어쨌든 2001년 한국시리즈 4차전(김응룡 감독의 삼성에 2-8로 밀리다가 18-11로 뒤집었다). WBC에서 일본을 물리친 것. 아쉬웠던 경기는 아무래도 2009년 WBC 결승전. 내가 잘못한 경기야. 마지막에 고의4구 못한 게 두고두고 남아. 3연패 후 3연승하다 7차전에서 졌지만 2000년 한국시리즈도 기억나. 그때도 역시 조계현이 현대 퀸란에게 고의4구를 줘야 됐는데 맞았어.”


○한국시리즈 7차전 요약(1995년 10월22일 잠실 롯데-OB전)

6차전 진필중을 깜짝 선발로 올려 기사회생한 OB는 7차전도 1회 2점을 선취해 앞서나갔다. 롯데 선발 윤학길은 원아웃도 못잡고 강판됐다. OB는 2-1로 쫓겼으나 3회말 롯데 박정태의 에러에 편승해 추가 2득점, 분위기를 잡았다. OB 에이스 김상진은 6이닝 2실점(1자책)으로 승리, 권명철은 7회부터 마무리로 나서 세이브를 거뒀다. 당시 OB는 1번 김민호(유)∼ 2번 장원진(중)∼ 3번 김상호(좌)∼ 4번 김형석(1루)∼ 5번 이명수(2루)∼ 6번 김종석(지)∼ 7번 안경현(3루)∼ 8번 심정수(우)∼ 9번 김태형(포)이 선발 라인업이었다. 정수근이 대수비로 들어왔다.

김영준 기자 gatzby@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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